<꽃의 전쟁> -01- 작고 하얀 새가 내 눈앞을 춤추며 날아간다. 어느새 새의 긴 꼬리가 불꽃으로 변해 있다. 하얀 새는 찬연하게 빛나는 불새가 되어 태양처럼 짙은 화염을 이글거리며 하늘 높이 솟 구쳐 올라간다. 검은 옷의 사내가 나타난다. 머리카락이 바닥에 길게 끌리 고 있다. 사내는 가슴에서 얼음칼을 뽑아 불새를 향해 던진다. 캬아아악―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나온다. 불새는 돌멩이처럼 땅으로 추락한다. 그러나 바위에 부딪쳐 산산조각 이 난 것은 불새가 아니라 하얀 모형 비행기이다. 검은 옷의 사내가 불에 달구어진 얼음칼로 내 몸을 수천 수 만 번이나 난자한다. 나는 갈가리 찢긴 피투성이의 나를 내려 다본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칼의 검은 손잡이가 눈 위로 솟아있는 아버지이다. 어머니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돌을 맞으며 죽어간다. 그 옆에서 검은 옷의 사내가 얼음칼을 쥐고 기다리고 있다. 사냥 꾼들이 작고 하얀 새를 몰아간다. 새는 떨리는 부리로 궁수에 게 사냥꾼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궁수의 화살에 맞은 것은.... 제발, 누가 얘기해줘. 이건 꿈이라고, 다 끝나버린 일이라고, 오늘밤은 무사히 잠들 수 있을 거라고.... ...작고 하얀 새가 내 눈앞을 춤추며 날아간다.... 제 1장 <메탈 베이스> 한준은 털썩 소파에 몸을 던졌다. 배는 쓰리도록 고프고, 아 침에 정신없이 들쑤셔놓고 나간 거실은 한심할 만큼 너저분했 지만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옛날이야기의 '우 렁각시'라는 캐릭터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실감하는 순간이 었다. 시계는 새벽 두 시 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삼십 분 전, 가까스로 계열사 주간지의 마감시간에 맞춰 하가 호텔의 개관 축하 리셉션 기사를 넘겼다. 지상 50층, 지하 6층, 연건평 11 만 186평의 하가 호텔은 하가 그룹의 재력을 상징하기에 충분 했다. 오후 여섯 시부터 시작한 그 초호화판 파티는 자정이 돼서야 끝났다. 정계?재계?법조계의 실세, 고급 관료, 군 장 성, 주요 기관장 등 대한민국에서 내로라 하는 거물들이 총집 합했다. 하가 그룹 강 회장의 화려한 가계도家系圖가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였다. 달로 칠 때 주간지의 네 번째 마감은 한준이 있는 월간보다 닷새 늦다. 그러니 마감 뒤에도 주간부의 일이 기다리고 있다. 지난달에 창간하여 아직 인원이 달리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 지만, 하가 호텔에 굳이 자신을 보낸 최 부장의 처사는 아무 리 생각해도 지나쳤다. 한준은 기분이 울적해서 주간부 사진 담당 임 기자가 좀 과하지 않느냐고 할 정도로 마셨다. 리셉션 홀의 분위기를 메모하고 있을 때 누가 샴페인 잔을 건네주기에 무심코 받으며 보니 강영후였다. 임 기자가 셔터 를 누르다 말고 그와 한준을 번갈아 보았다. 한준은 그 잔을 서빙하던 웨이터의 쟁반 위에 올려놓았다. "경찰서에서는 지낼 만했습니까? 들어보니 거기서도 VIP였 다구요. 아마 교도소 생활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당신, 말이 지나치군. 입조심 좀 하는 게 어때?" 강영후의 뒤에 서 있던 건장한 사내가 나직하게 으르렁거렸 다. 한준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무슨 소리. 내가 얼마나 조심하고 있는지 모르나본데 어디 한 번 내가 아는 것 다 말해볼까? 이봐, 강영후 씨. 그 기사, 취재한 것의 반도 못 쓴 거야, 알아? 당신 아버지 아니었으면 그 정도로 유야무야 넘어가는 건 턱도 없었어. 부모 잘 만나 서 무슨 짓을 해도 괜찮고, 당신 정말 좋겠어." 주위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주시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영후는 말없이 미소지었다. 한준은 그때 처음으로 강영후의 눈을 보았다. 지적이고 시니컬한 얼굴에 너무도 어 울리지 않는 짐승 같은 두 눈동자가 짙게 그늘져 빛나고 있었 다. 한준은 보석처럼 아름다운 사내의 전신에서 순간 역한 피 냄새를 맡았다. 그 뒤틀린 이질감이 한준을 퍼뜩 취기에서 깨 어나게 했다. 강영후는 미소를 띤 채 한준의 옆을 지나갔다. "젠장, 확실히 난 집 자식은 다르네. 한 대 갈기진 않더라도 말 한 마디는 할 줄 알았는데." 임 기자는 못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하가의 황태자, 자신의 가십을 쓴 기자와 일대 난투극>같은 쓸만한 헤드라인 이 눈 앞에 어른거렸던 모양이었다. 한준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취해 있었다 해도 실수 한 것은 사실이었다. 찜찜한 기분을 달래려 몇 차례 심호흡을 했다. 자동 응답기의 외출 램프에 불이 깜박거리는 것을 보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나다. 좋은 자리가 나왔구나. 스물 여섯 먹은 아가씬데 E대 졸업하고 올해 입사한 걸 비서실에 넣어두고 지켜보는 중이 다. 무엇보다 가정교육을 잘 받아서 아주 참하거든. 너만 괜찮 다면 내일이라도 만나게 해주마. 전화해라. ...그리고 얘, 아무 리 바빠도 밥은 꼭 챙겨 먹어야 한다. 저번에 보니까 얼굴이 많이 상했어. 임 차장댁한테 부탁해놨으니 네가 집에 일찍 오 는 날은 반찬거리 좀 갖다줄 거야. 원, 당최 마음이 안 놓여 서... 꼭 나가 살아야겠으면 파출부라도 쓰라니까 웬 고집이냐. 서른 한 살이나 먹은 놈이 혼자 밥하고 빨래하고, 왜 그리 청 승을 떨어. 어서 짝을 맞춰줘야 내가 편하겠다, 이놈아." 한준의 고모인 서 사장은 맨주먹으로 시작해서 사십여 년에 걸쳐 탄탄한 중소기업인 양화 유지를 일구어낸 사람이지만 남 녀의 역할에 대한 사고방식은 아직도 조선시대를 벗어나지 못 했다. 그 마음에 들 정도의 가정교육을 받은 여자라니 상상하 기조차 부담스러웠다. 한준은 어쨌든 마감도 끝났고, 한 번 뵈 러 가긴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넥타이를 풀었다. "너 아주 바쁘다? 일주일째 한 시가 넘도록 집에 안 들어오 고." 첫마디부터 투덜거리는 목소리의 임자는 홍재였다. 한준은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아무리 나쁜 기분도 홍재 앞 에서는 사라져버렸다. "일이 아무리 고달파도 삐삐 열 번 치면 한 번쯤 연락해줄 수 있는 거 아냐? 아아, 애정이 완전히 얼음장이 됐구나... 그 러지 마라. 나 이 땅 뜨는 거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여러 말 안한다. 모레 오후 아홉 시까지 카바티나로 와. 민호랑 규섭이 하고는 약속잡았다. 그렇게 다 모이기가 어디 쉽냐? 안 오면 혼날 줄 알아. 민호 귀국한 것도 축하해줘야잖아?" 한준은 리셉션 홀에서 눈으로만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백민 호를 떠올렸다. 며칠 전에 귀국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그 자 리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마음 같아서는 붙들고 밤새워 얘기하고 싶었지만 시간에 쫓겨 그럴 수가 없었다. 셔츠가 날아가 소파 등받이에 걸쳐졌다. 안 그래도 난장판 이던 거실에 옷가지까지 가세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 졌다. "힘든 하루였지, 쇼치필리?" 뜻하지 않게 흘러나오는 낯설은 목소리에 옷을 벗어던지던 손을 멈췄다. "넌 기가 막히게 아름답더군. 내가 생각해오던 모습 그대로 였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서... 후후후... 마지막으로 울어 본 게 언제였지?" 모음을 길게 끄는 듯한 어조의, 약간 금속음이 섞여있는 베 이스였다. 인간의 성대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도저히 믿어지 지 않을 정도로 감미로운 음색이었다. 한준은 벗다 만 바지에 걸려 넘어질 뻔하면서 응답기 옆으로 다가갔다. "넌 행복해 보이더군. 그래선 안되지. 네가 나 없이 행복하 다니, 절대로 허락 못해. 지금 이 순간부터 네 숨소리 하나 머 리카락 한 올까지도 모두 내 것이다. 영원히 말이야.... 반항할 생각은 버려, 쇼치필리. 난 어떤 싸움에서도 진 적이 없거든." 쇼치필리라니? 다음 메시지로 넘어가려는 것을 서둘러 후진 버튼을 눌러 되돌렸다. 몇 번을 다시 들었다. 분명 그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 이토록 화려한 목소리의 소유자는 없었다. 이 사내는 누굴까? ...장난전환가? 아니겠지. 목소리로 보아 나와 비슷한 연배 같은데 서른 넘 은 사내가 남자 목소리로 녹음된 응답기에 대고 이런 식의 장 난을 친다는 얘기는 여지껏 들어보지 못했다. 혹시 여자를 고 객으로 하는 신종 텔레폰 서비스 같은 건가? 그럴 지도 모른 다. 이런 목소리를 가진 남자라면... 왜 나한테 했는지는 모르 겠지만. 옷을 마저 벗다가 문득 열흘쯤 전에 응답기를 만졌던 것이 기억났다. 인사말을 바꾸려 했는데 적당한 멘트가 없어서 임 시로 야니의 피아노곡을 틀어놓았다. 시간날 때 다시 녹음해 야지 하고는 마감기간을 지내면서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러니 응답기는 음악만 내보내고 있을 것이다. 한준은 미소를 지었 다. 안됐군, 메탈 베이스 씨. 전화를 잘못 거셨어. 쇼치필리 양 이 아니라서 미안해. 다음부터는 전화번호 잘 확인하고 돌리 라구... 그나저나 쇼치필리라니 이상한 이름이다. 서양 여잔가? 아니면 별명? 샤워를 하면서 그 일은 거의 잊어버렸다. 자러 들어가다 생 각이 나서 응답기 앞에 앉았다. 괜찮은 말을 궁리해보았으나 1분 후에 포기하고 전에 쓰던 인사말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서한준입니다. 지금은 집에 없으니 말씀 남겨주시면 돌아 오는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K일보사의 시사 월간지가 회의용 테이블 위로 내던져졌다. <양수리 토막 시체 유기 사건의 현장에서>, 눈에 확 들어오 는 붉은 타이틀이 주먹만하게 찍혀 있었다. "그쪽 사람들 희색이 만면하더군요. 그럴 만하죠, 발매 하루 만에 재판 들어갔다니까. 좀 물어봅시다. 일할 생각들이 있기 는 한 겁니까?" 침착하게 서두를 꺼낸 최정환 부장은 좌중을 한 사람 한 사 람 매섭게 쏘아보았다. 사무실 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최 부장, 통칭 최통은 '서울의 봄'부터 문민정부 수립까지, 5?6공 을 통산하는 20대 특종 중 다섯 건을 혼자서 따낸 인물이다. 누구나 뒤에선 어떤 욕을 하건간에 그 앞에서는 주눅이 들게 마련이었다. 양수리 인근의 야산에서 방수포로 싸인 일곱 구의 토막난 시체가 발견된 것은 나흘 전의 일이었다. 사건 자체가 가진 엽기성에다, 신체부위들로 장난을 쳐놓은 범인의 행위가 매스 컴의 핫 이슈로 떠올랐다. 그러나 월간 K를 제외한 월간지들 은 모두 강 건너 불구경이었다. 책은 이미 트럭에 실려 전국 으로 운송되고 있을 때였으니 말이다. "기사를 위해선 팔 하나쯤 아깝지 않다, 특종을 잡으려면 목숨도 걸겠다, 이 정도는 돼야 기자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 회사, 자선단체 아닙니다. 꺼떡꺼떡 놀다가 마감 닥치면 별 볼일 없는 글 몇 줄이나 써내는 놈팽이들 먹여살릴 만큼 썩어나는 돈 없어요. 뛰어다니기 귀찮으면 사표 쓰세요. 화류 계 스캔들 따위에나 킁킁거리는 넝마주이가 아닌 진짜 기자 좀 데려오게 말입니다." 옆얼굴에 최 부장의 차가운 시선이 화살처럼 꽂혀왔지만 한 준은 모른 척하고 있었다. 이제쯤 면역이 될 법도 한데 그런 식의 기습적인 적의 앞에서는 아직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 다. 부장은 한준을 노려보다가 의자를 부서져라 밀어내고 나 가버렸다. 여기저기서 투덜거리는 소리들이 비어져 나왔다. 하나둘씩 우그러진 얼굴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늦게 들어 와서 부장 눈치를 보느라 멀찌감치 앉아있던 송 선배가 한준 옆으로 왔다. "연예인 보고 화류계라니, 최통도 무식하긴.... 신경쓰지 마 라. 한 번 삐지면 육 개월은 기본이니 그냥 귓등으로 흘려." "일 년도 가겠어요." "인간이 저렇게 변할 수 있냐. 왕년의 최통이지 노후대책 시급한 나이 되니까 몸 사리는 건 다른 속물들과 한가지야." "이러다간 우리 것에 주간뿐 아니라 일간까지 하가 관련 기 사는 다 제가 떠맡게 되는 거 아닐까요? ...부장이 손수 떼밀 지 않아도 오늘 점심시간쯤 옥상에서 뛰어내려야겠는데요." "거, 주간부에 소문이 짜하던데... 어제 강영후가 무지 상냥 했다며?" "임 형이 얼마나 실망했다구요." "그랬을 거야, 그 촉새." "저거 읽어봤어요?" 한준이 테이블 한가운데를 점령하고 있는 월간 K를 가리키 자 송 선배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어, 쇼킹하던데. 쥐포도 그렇게 찢지는 않았을 거야... 근데 꼭 그렇게 해부학 강의를 해야 되냐? 발목 절단면에 덜 끊긴 힘줄들이 어떻게 너덜거렸다는 둥, 창자를 펴서 발라낸 등뼈 몇 줄을 순대처럼 싸놨다는 둥, 완전히 월간 정육점이더라 구.... 누가 썼을 것 같아?" "누군데요?" "박상우." "하긴, 박 선배 외엔 없죠." "쥐포 찢어논 게 그 자식인지도 모르지. 특종을 위해서는 지 엄마도 내다팔 놈이니까. ...어어, 점심 전에는 읽지 마. 햄 버거가 예사로 안 보인다구." 한준은 월간 K를 집어들고 몇 장 넘겨보았다. 게재한 사진 들은 모두 흑백으로 처리하고 군데군데 검은 칠을 해놓았으나 원래의 형태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현장에는 범인 에 대한 어떠한 증거도 찾아볼 수 없었다. 범인은 마치 도살 하여 필요한 부분 다 떼낸 돼지를 버리듯 시신들을 유기했다. 현재 경찰의 손에 있는 것은 주인을 알 수 없는 신체조각들 뿐이다...> 서울지검 기자실은 한가했다. 문 앞에서는 서넛이 모여 잡 담하고 있고, 아침부터 소파에 누워서 코를 골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한준은 대충 눈인사를 한 후 자리를 잡고 앉아 월간 K를 펼쳐들었다. 양수리 기사를 반쯤 읽었을 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쳤다. 검찰청 출입하면서 알게 된 월간 K의 권 기자였다. 권은 한준 에게 자판기에서 뽑아온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의정부 지청은 불난다는데 여긴 참 썰렁하네. 고법으로 넘 어와야 북적북적하겠지만 글쎄, 넘어올 수나 있을는지. 원체 좌우 십 리가 안개 속이라.... 기가 막히지?" 권은 펼쳐진 페이지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역시 박 선배잖아? 양수리로 뜨기 바로 전날까지 우리하고 밤새 마감 축하주 꺾었다면 믿겠어?" "권 형도 몰랐다구?" "대외 대내 보안철저였어. 데스크랑 둘이서만 쿵쿵따리 한 거야. 저번에 서 형한테 당했던 것 때문에 되게 열받았나봐." "그럴 게 뭐 있어. 결과적으로 보면 오히려 잘된 일이었잖 아. 우리 회사 그 기사 때문에 망할 뻔했던 거 몰라?" "박 선배는 그렇게 생각 안하니까 문제 아냐. 서 형, 콱 찍 혔다구." "찍히기로 치자면 최통한테 당하는 도끼만행으로도 벅차. 참아달라고 해줘." 호출기가 울려서 보니 회사였다. 전화한 그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아까 나올 때까지만 해도 별 소리 없다가 갑자기 내근 이라는 거였다. 한준은 웃고 말았다. 어차피 화내봤자 소용없 는 일이었다. 예, 부장님 마음대로 하세요. 괜찮습니다. 화장실 청소라도 하라시면 해야죠. 주차장으로 가는 중에, 마침 올라오고 있던 수사과의 황태 수 계장과 마주쳤다. 어두운 얼굴을 숙이고는 한준이 바로 앞 에서 인사를 해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갔다. "계장님!" "어?" 황 계장은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하세요? 코 베가도 모르시겠어 요?" "응, 자네로군." "언제 오셨어요?" "어젯밤에." "일주일이나 어딜 가셨던 건데요?" "저기 좀." "저기가 어딘지 좀 알면 안될까요?" "뭐 특별히 얘기할 거 있나." "에이, 그러지 마시구요. 이따금은 괜찮은 것도 건져야 자리 보전하죠. 회사, 지금 월간 K 때문에 시베리아거든요." "월간 K? 양수리 일 말이야?" "예." 황 계장은 얼굴을 문지르며 먼 산을 쳐다보았다. "몸 조심해. 항상 긴장하고 있으라구." "뭘 말씀입니까?" "미친 짐승들이 도처에 널렸어. 모두가 위험해." 황 계장의 심각한 말투는 오싹했으나 한준은 일부러 웃어넘 겼다. "계장님.... 괜히 겁주지 말고 기사거리나 주세요, 예?" 황 계장은 대답없이 한준의 옆을 지나가며 혼잣말처럼 중얼 거렸다. "대체 어디까지 끌고나갈 셈이지? 미친 자식들..." 한준의 아버지 고향 후배인 그는 한준이 어렸을 때부터 보 아온 사람이었다. 말해 줄 생각이 없을 때는 하늘이 두 쪽 나 도 입을 열지 않는 성격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단념하고 몸 을 돌리려 할 때 황 계장이 한준을 돌아보았다. "내가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을 도와달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건가? 도망칠 건가?" 한준은 뜻밖의 말에 어리둥절해서 그의 안색을 살폈다. 농 담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한준이 대답할 때까지 움직이 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도망 안 칩니다." "진심이야?" "물론이죠." "...약속했네." "약속했습니다." 그는 한준을 향해 팔뚝을 불끈 치켜들었다. 한준 역시 주먹 을 쥐고 마주 흔들어 보였다. 한준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펀 팩토리의 CD를 틀었다. 기분이 안 좋을 때면 언제나 하는 달밤의 체조를 시작했다. 음악에 맞춰 옷을 벗어던지고, 거실 한가운데에서 한참 춤추 다가 구석에 처박혀있던 잠옷을 발견했다. 노래를 따라 부르 며 잠옷을 입고 응답기를 재생시켰다. "옷 갈아입는 중이었나, 쇼치필리?" 메탈 베이스가 부드럽게 물어왔다. 한준은 깜짝 놀라 응답기를 돌아보았다. 나지막한 웃음소리 가 흘렀다. "벗어버려. 아무 것도 걸치지 마. 그깟 생명없는 천조각 따 위로 네 눈부신 육체를 숨기지 말아.... 샤워할 시간이지, 쇼치 필리? ...휴... 물줄기가 네 몸을 타고 흐르는 모습은 정말 섹 시할 거야. 생각만 해도 참을 수가 없군. 아랫배까지 굳어버렸 어. ...네 혀는 감촉이 어떨까? 그 붉은 입술은? ...하, 흐흡..." 거친 숨소리가 계속되었다. 끊어진 후에도 한준은 꼼짝않고 서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천천히 손을 뻗어 응답 녹음을 틀었다. "서한준입니다. 지금은 집에 없으니 말씀 남겨주시면 돌아 오는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잘못 걸린 전화가 아니었다. 한준은 음악을 끄고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내가 항상 응답기를 틀어놓은 채 옷을 갈아입는 걸, 그 후에는 샤워를 한다는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어제도 그 는 내가 녹초가 됐던 걸 알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파고 들 어왔다. 위험, 위험, 위험, 위험. 아니, 아니야.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그저 우연히 들어맞은 것 뿐이다. 대부분 밤에는 직장에서 돌아와 피곤해 하고, 옷 갈아입고, 샤워하니까. 그래... 간단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자동 응답기를 사용하는 집이면 남자 음성이건 여자 음성이건 상관없이 장난을 치는 거다. 남자는 더 황당해 할테니까 특히 표적으로 삼을 수도 있겠지. 별 것 아니다. 며칠간 응답기를 꺼놓으면 그만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지독한 기억이 난마처럼 온몸을 헤집 어놓고 있었다. 한준은 거세게 머리를 흔들었다. ...빌어먹을, 그만둬. 기억하고 싶지 않아... 제발... 제발 그만 두라니까! 제 2장 <핏빛 기억?Ⅰ> 2월의 날씨로는 드물게 포근한 토요일이었다. 한준은 친구 들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가고 있었다. 뒤에서 자전거가 오는 기척이 났다. 한준은 시계를 보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니?" 옆으로 다가온 자전거 위에서 한 사내가 말했다. 삼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였다. "약속시간에 늦어서요." "무슨 약속인데?" "친구들하고 영화 보기로 했어요." "J극장에서?" "예." 그는 한준과 나란히 갈 수 있도록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이름이 뭐지?" "서한준요." "초등학생?" "중학교 올라가요." "어딘데?" "선일중이요." "네 자지는 누가 만져주지?" 한준은 사내를 쳐다보았다. 잘못 들었나 해서였다. "털은 얼마나 났어? 새콤한 냄새가 난다." 입안에 침이 가득 고여있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내는 슬며시 손을 뻗어 한준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내가 빨아줄께, 한준아. 기분이 아주 좋단다." 그는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한준은 소름이 오싹 끼쳤다. 전속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장소는 모퉁이 돌아 바로였다. 아이들과 합류하고 둘러보니 사내는 사라지고 없었다. "뭐 하느라 이십 분이나 늦냐? 영화값 니가 다 내!" 한 차례 왁자하게 지청구를 들었다. 친구들과 한 블럭 떨어 진 J극장으로 몰려가면서 한준은 사내의 일을 잊어버렸다. 본영화가 시작되고 십 분쯤 지났을 때, 한준의 왼편에 앉아 있던 여고생들이 좌석열 끝의 누군가와 잠시 다투는 것 같더 니 "재수다 정말" 하면서 자리를 옮겼다. 한준은 영화에 푹 빠 져서 옆자리에 누가 와서 앉는지 관심도 없었다. 큼직한 손이 허벅지 위에 놓였다. 흠칫해서 고개를 돌린 곳 에 웃고 있는 사내의 얼굴이 있었다. 한준은 가까스로 비명을 억눌렀다. 친구들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모두들 영화에 정 신이 팔려 있었다. 허벅지를 주무르며 슬슬 위로 올라오고 있 는 손을 밀어내려 안간힘을 썼으나 두 손으로도 사내의 손가 락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사내가 한준의 사타구니를 움켜쥐 었다. 바지 지퍼가 내려갔다. 축축한 손이 팬티를 헤집고 들어 왔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일어서는 한준을 팬티 속에 들 어있는 손이 무서운 완력으로 주저앉혔다. "왜 그래?" 옆자리의 친구가 물어왔다. ...봤을까? 머리가 아찔했다. 친구들에게 이런 꼴을 들킬까봐 너무나 무서웠다. 한준은 엉거주춤 몸을 굽혀 바지 앞섶을 가 리며 최대한으로 태연한 목소리를 냈다. "아니, 그냥... 화장실 좀 가려고." 친구가 고개를 돌린 후에도 긴장하여 꼼짝할 수가 없었다.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화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사내는 여유 있게 한준의 성기를 주물러댔다. 다른 손으로는 한준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다리 사이에 갖다대고 몇 번 바지 위에서 문지 르게 하더니, 팽팽해진 지퍼를 열었다. 발기하여 맥박치는 음 경이 튀어나왔다. 한준에게 억지로 쥐게 했다. "네 이쁜 손으로 문질러줘. 널 처음 봤을 때부터 쌀 것 같았다구..." 사내가 뜨거운 입김을 뿜으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소름끼 치게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에게서 손을 빼내려고 했으나 허 사였다. 사내는 한준의 음낭을 손에 쥐고 한 쪽씩 굴리며 뺨 을 깨물었다. 사내의 것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이 세차게 꿈 틀거렸다. 한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사내를 있는 힘껏 떠 밀어 버렸다. "어, 한준아! 왜 그래?" "어디 가는 거야?" 옷도 제대로 여미지 못하고 뛰어나가는 등 뒤로 친구들의 목소리가 와글와글 따라왔다. 한준의 머리 속에는 어서 이 자 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영문을 모르는 친구들이 계속 전화를 해댔지만 한준은 이불 을 뒤집어쓰고 누워만 있었다. 무슨 일이냐는 어머니의 성화 에도 묵묵부답이었다. 밤늦게 들어온 아버지가 한준의 방으로 왔다. 이불을 뺏긴 한준은 땀으로 범벅이 된 창백한 얼굴을 떨구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 "뭐야? 왜 그러는 거야?" 아버지는 고함부터 질렀다. 몇 번 윽박질러도 입을 열지 않 으니 언제나처럼 손찌검으로 이어졌다. 조마조마하게 지켜보 고 있던 어머니가 달려들어 아버지를 끌어냈다. "참으세요. 지금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나봐요... 그만 두시라니까요." "당신이 그렇게 싸고 도니까 애새끼가 점점 못나지잖아! 우 리 집안엔 저런 병신새끼 없다구!" 한준은 코 밑에 손바닥을 대어 떨어지는 핏방울을 받았다. 휴지가 바로 지척에 있었지만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얼마 후 에 다시 들어온 어머니가 휴지를 찢어서 피를 닦아주었다. "어휴, 이 일을.... 피가 안 그쳐서 어째." "......." "성격이 급해서 저러신다. 아버지 이해해라, 한준아. ...널 사 랑하셔." 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머니 마음이 편하다면 고개쯤이야 얼마든지 끄덕여줄 수 있었다. 맞을 때마다 듣는 그 소리 귀에 못이 박혔어. 사랑? 저런 인간은 어디 가서 콱 죽어버리라고 해. 중학생이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질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특 별하게 새로운 일은 없었다. 같은 학교에서 온 아이들이 얼마 없어 처음에는 서먹했으나 금세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다. 매일 방과 후에는 편을 갈라 축구 비슷한 놀이를 했는데, 집 에 가는 시간을 늦춰주는 일이었기 때문에 한준은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그날도 주변의 식별이 어려울만큼 어둑해지고 나서 놀이가 파했다. 3월의 쌀쌀한 날씨였지만 수돗가에 몰려가서 웃통을 걷어붙이고 물을 끼얹을 정도로 땀을 흘렸다. "야, 너 모형 비행기 있다며?" 누군가가 한준 옆에서 씻고 있던 안경쓴 아이한테 소리쳤 다. 모두 우와아 하는 표정으로 안경을 쳐다 보았다. "응, 아빠가 일본 다녀오면서 사왔어." 안경이 우쭐해서 대답했다. "U컨트롤이야, 라디오야?" "얼만데?" "엔진은 뭐야?" "2기통 디젤 엔진이야. 라디오 컨트롤이구... 우리나라에선 돈 있어도 못 사는 거야." 한준은 대충 물기를 닦고 떠들썩한 사이를 빠져나왔다. 거 리는 벌써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안경의 아버지는 시간날 때마다 안경과 함께 백화점에 가서 이것저것 사주고 안경이 뭘 잘못해도 너그럽다고 했다. 주말 엔 가족과 외식하는 아버지, 다정하고 따뜻한 아버지. 찌링찌 링, 찌링찌링, 자전거 벨 소리가 점차 가깝게 들려왔다. 한준 은 모형 비행기를 생각했다. 서점에 진열된 외국잡지에서만 보던 그 날씬한 날개의... "모형 비행기가 갖고 싶어?" 한준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자전거를 탄 그 사내가 바로 옆에 와 있었다. 한준은 펄쩍 뛰어 물러섰다. "여...여기 어떻게..." "네가 가르쳐줬지 않아, 선일중이라고." 사내는 온화하게 말했다. 한준은 잔뜩 경계하며 사내에게 최대한 떨어져서 뛰듯이 걸었다. 사내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모형 비행기가 필요하면 내일 여섯 시까지 J극장으로 와. 갖고 싶은 대로 줄 테니까." 다음날 오후 여섯 시 십 분에 한준은 J극장 앞의 횡단보도 를 건너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던 사내가 웃으면서 손짓을 했 다. 사내와 함께 간 곳은 미로 같은 골목 끝에 있는 여관이었 다. 그는 방 한 켠에 세워놓은 큼직한 가방을 열어 한준 앞에 밀어놓았다. 다양한 종류의 모형 비행기가 가득했다. 한준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탄성을 질렀다. "이거 진짜 날아요?" "보여줄까?" 사내는 선수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모형 비행기는 까 마득히 날았다가 추락하듯 곤두박질쳐 바닥에 닿을 만큼 저공 비행을 했다. 전봇대를 몇 바퀴 맵시있게 돌아 다시 창문으로 날아들어왔다. "네 거야." 사내는 사뿐히 착지한 모형 비행기 위에 리모콘을 얹어서 한준의 손에 쥐어주었다. "정말요?" "정말이고말고. 내 말만 들어주면 나머지도 모두 가질 수 있어. 한 번에 한 개씩... 어때?" 한준은 머뭇거렸다. 뿌리치고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 었으나 비행기가 너무 탐이 났다. "...안...가질래요.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모르고..." 한준은 필사의 힘을 발휘하여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사내는 느긋하게 웃었다. "가르쳐줄께. 어렵지 않단다. 난 좋은 선생이거든. 여러가지 면에서..." "......." 한준은 사내가 바지를 벗는 것을 보고 있었다. 한 달도 안되어 친구 방 벽장 속에 숨겨뒀던 모형 비행기들 이 들통나고 말았다. 친구의 어머니는 아들을 닦달하여 한준 의 소유라는 것을 알아내자 그것들을 모두 담아가지고 집으로 찾아왔다. 이렇게 비싼 걸 부모 몰래 살 수는 없을 테니 합법 적인 물건은 아닐 거다, 물론 한준이 같은 모범생이 혼자서 한 일은 아닐 것이고 불량한 친구들의 꾐에 빠져 잠시 실수를 한 것 같으니 더 어긋나지 않게 타일러 달라, 대략 그런 요지 였는데 문제는 아버지도 옆에서 듣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준 은 사흘간 학교를 결석했다. 온몸이 시퍼렇게 부어올라 눕지 도 앉지도 못했다. 저 사람이 아버지라고? 개새끼, 제발 죽어 버려라.... 통금은 오후 다섯 시였다. 수업 끝나자마자 달려와 아버지 의 전화를 받아야 했다. 사내가 계속 학교 주위를 맴돌았다. 한준은 자전거 소리만 나면 긴장하게 되었다. 한 번은 먼발치 에서 그를 보고 숨었는데 지척으로 스쳐가는 그의 두 눈이 벌 겋게 충혈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한준은 꿈에서 그 눈을 보 고 놀라 깨곤 했다. 학교가기가 무서웠지만 사내의 얘기를 부 모에게 할 수는 없었다. 그날은 주번일이 늦게 끝나 다섯 시 사십 분에 동네 어귀로 뛰어들어 가고 있었다. 다섯 시의 확인 전화를 안 받으면 아 버지가 달려왔다. 평소 잘 다니는 수퍼의 주인여자가 "학교 갔다 오는구나" 하며 아는 척을 해도 대꾸할 겨를이 없었다. 집이 있는 골목으로 막 꺾어들려 할 때 뭔가에 세차게 부딪 쳤다. 사내는 자전거를 내팽개치더니 넘어져 있는 한준에게 다가왔다. 한준은 멱살을 잡혀 끌려갔다. 환풍구들이 늘어서 있는 상가 뒤의 으슥한 골목은 일 년 열 두 달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소리친다고 누가 듣지도 못했다. 사내는 한준을 벽에다 밀어붙이고 교복 바지를 찢었다. 한준 이 저항하자 목을 졸랐다. 지독한 힘이었다. 머리에 피가 몰려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사내는 한준의 다리 하나를 어깨 에 걸치고 다른 한 쪽은 옆구리에 끼었다. 사내의 성기가 그 대로 밀고 들어왔다. 한준은 벽과 사내 사이에 낀 채로 꼼짝 못하고 당하고 있었다. 갑자기 사내가 빠져나갔다. 한준은 털썩 땅에 떨어졌다. 새파랗게 질린 아버지가 사내를 사정없이 두들겨팼다. 한준 은 멍하니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여긴 웬일일까. 아... 수퍼 아 주머니가.... 사내는 맞고만 있었다. "...어,어떻게 이런... 짐승 같은 놈! 미,미친 새끼..." 한준은 아버지가 말을 더듬는 것을 처음 들었다. 어머니가 저만치서 뛰어왔다. 하의가 벗겨진 채 쓰러져 있 는 한준과 피범벅이 된 사내를 보고는 헉 숨을 들이마셨다. "여보, 그만둬요! 죽일 참이에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허리춤을 붙들고 매달렸다. 아버지는 어 머니를 뿌리치려 펄펄 뛰었으나 어머니 역시 필사적이었다. 아버지에게 멱살이 잡혀있던 사내가 부러진 이를 뱉어내며 품 속에 손을 넣었다. 그는 느물느물하게 말했다. "당신이 쟤 애비요? 정말 맛 좋은 아들을 뒀수다. 부럽네.... 당신은 맨날 먹겠지?" "뭣?" 아버지의 주먹이 사내의 턱을 강타했다. 고개가 홱 돌아간 사내가 히죽 웃는 것을 한준은 똑똑히 보았다. 위험 위험 위 험 위험. 찢어질 듯한 경고의 비명이 한준의 머리 속을 가로 질렀다. 사내의 손이 품에서 빠져나왔다. 뭔가 가로등 불빛에 번쩍인 순간 섬뜩한 파육음이 일었다. 사내는 피가 흐르는 긴 칼날을 아버지의 가슴에서 뽑아냈 다. 아버지는 눈을 홉뜨고 있었다. 입가로 거품섞인 핏물이 부 글거렸다. 사내에게 떼밀린 아버지는 베어진 나무처럼 쓰러졌 다. 사내는 낄낄 웃으면서 아버지의 눈에 칼날을 끝까지 박아 넣었다. 아버지의 목덜미를 뚫고 비어져나온 칼끝이 핏방울을 떨구 며 가로등 불빛에 빛나고 있었다. ...눈 위로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솟아있는 검은 손잡이... 어머니의 비명소리가 아득 하게 들려왔다. 저런 인간은 어디 가서 콱 죽어버리라고 해. 저 사람이 아 버지라고? 개새끼, 제발 죽어버려라. 한준은 의식을 잃었다. 제 3장 <외아들 클럽> 카바티나에 도착한 것은 아홉 시 십 분이었다. 넓은 홀 안 은 평소에 비해 꽤 한산했다. 홍재와 만날 때면 늘 지정석으 로 앉는 자리가 있었기 때문에 두리번거릴 것 없이 홀을 가로 질렀다. 중앙의 모퉁이를 돌자 이쪽을 보고 앉아있던 홍재가 손을 흔들었다. "아하, 이게 누구셔. 야, 서한준!" 혀 꼬부라진 시비조의 음성이 쩡 하고 울렸다. 한준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테이블에 박상우가 반쯤 누워 있었다. K일보사 와 가까운 카바티나에 박상우가 자주 퍼져있곤 한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렇게 딱 마주치기는 처음이었다. 홍재가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한준은 그에게 가만 있으라는 눈짓을 했다. "안녕하세요." 껄끄러웠지만 모른 척할 수도 없어서 인사를 건넸다. 박상 우가 자기 옆자리를 두들기며 소리를 질렀다. "앉아! 한잔 빨라구!" "일행이 있습니다만." "뭐야?" "죄송합니다. 나중에 뵙죠." "하, 이거 이거, 아주 웃기는 자식이네. 아쉬울 때는 간이라 도 빼줄 것처럼 살살거리더니, 뭐? 나중에 뵙쬬오?" "박 형, 그만 일어서십시다. 많이 취하셨어." 일행 둘이 그를 달래며 양쪽에서 부축해 일으켰다. "아아, 이러지 마슈. 나는 한강을 소주로 채워 마셔도 이 자 식만 보면 확 깨는 사람이야. 명색이 대학 후배란 놈이 날 가 지고 공놀이를 했다구. 나쁜 새끼..." "무슨 일이요?" 어느새 다가온 홍재가 한준 옆에서 물었다. 키가 이 미터에 팔뚝이 남들 넓적다리만하고, 더구나 인상까지 덩치값을 하는 남자는 한 번 주위를 훑어보기만 해도 반경 십 미터 이내가 텅 비는 법이다. "죄,죄송하게 됐습니다." "뭐야, 저 자식한테 할 말이 있단 말이야!" 일행은 버둥거리는 박상우를 떠메다시피 하면서 줄행랑을 놓았다. 홍재가 픽 웃었다. "왜들 저래, 어디 아픈가?" "네 얼굴 보고 도망 안 가는 사람이 아픈 거지." "헐뜯지 마, 임마." "다들 왔어?" "민호는 아직. 근데..." 자리에는 오규섭과, 홍재의 동생 정혜연이 앉아 있었다. 한 준은 그녀를 보고 내심 긴장했으나 얼굴에는 나타내지 않았 다. "저 골칫거리가 따라왔어." 홍재가 혀를 차며 말했다. 정혜연의 눈꼬리가 단박에 치켜 올라갔다. "뭐야?" "혜연이 보니까 반가운데 뭘 그래. 저번에 패션쇼 좋더라. 수석 디자이너 될려면 얼마나 더 있어야 하는 거야?" 그녀는 웃지도 않고 힐끗 한준을 쏘아보았다. "오늘 우리 오빠 생일인 거 모르고 왔죠?" "어?" 한준이 놀라서 쳐다보자 홍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 를 으쓱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맞구나. 야, 미안하다. 어쩌냐?" "뭘 어째 임마. 냅둬." "규섭이 넌 좀 가르쳐주지 그랬어." "알고 있는 줄 알았지." 오규섭이 특유의 느린 어조로 대꾸했다. 얼마 전에 봤을 때 보다 얼굴이 많이 좋아져 있었다. 한준은 그의 어머니 소식이 궁금했으나 이 자리에서 물어도 될지 망서려졌다. 오규섭의 어머니는 만성신부전으로 만 2년째 혈액투석을 받아오고 있었 다. 일주일마다 두 번씩 해야 하는 그 작업으로 진 빚 때문에 선친에게서 물려받은 출판사마저 넘겨야 할 형편이었다. "아까 그놈은 뭐야?" 홍재가 담배를 피워물며 한준에게 물었다. "월간 K 기자야. 저번 남유미 기사 낼 때 내가 잘못했거든." "남유미 기사? 그, 강영후 깐 거?" "응." "하여간 그 강가놈은 맛 좀 봐야 했는데. 너무 싱겁게 끝나 버렸잖아, 젠장." "오빠가 그런 말하면 다 웃어. 졸부 자식이 클래식한 귀족 질투하는 거라구 말야." "별 클래식 같은 소릴 다 듣겠군. 게다가 질투라니 누가..." "가만 있어도 밑에서 받쳐주고 뒤에서 밀어주고 위에서 끌 어주는 그런 자리가 질투 안 난다구? 법적으론 누구나 평등한 세상이니까 대학도 같이 다녔지만 평생 레저타운 사장이나 하 다 끝날 오빠하고 강영후 선배는 완전히 격이 다른 인생이잖아?" "그래, 그놈 인생 눈부셔. 근데 내 생일날 그런 얘길 하는 저의가 뭔데? 기분 나쁘니까 너 빨리 가버려." "나잇값 좀 하란 말야." 정혜연이 차갑게 대꾸했다. 혼잣말로 뭐라고 투덜거리던 홍 재가 갑자기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주위 테이블의 시선이 기둥을 돌아 이쪽으로 오고있는 한 남자에게 홀린 듯 쏠려 있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자수정 넥타 이핀과 짙은 녹색 스리피스 정장의, 그림 같은 미남자였다. 그가 일행 옆에 와 서자 차가운 듯 하면서도 달콤한 향기가 흘렀다. 그는 아직까지도 대학 입학 선물로 한준이 줬던 상표 의 오드콜로뉴를 쓰고 있었다. "질렸다. 열 시다, 열 시. 이년만에 친구들 만나면서 늑장부 려? 박사라고 재냐?" 홍재가 계속 타박을 주려 하자 정혜연이 눈을 흘겼다. "반가워요, 오빠. 내 얼굴 잊은 건 아니죠?" 백민호는 말없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혜연이 백민호에게 몸을 비켜 옆자리를 내주는 것을 오규섭이 우울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백민호가 홍재에게 봉투 한 장을 내밀었다. "무성의해 보여도 이해해라. 선물 살 시간이 없었어." "괜찮아. 너보다 더한 놈도 있는데 뭘." 한준이 탁자 밑으로 숨는 시늉을 하자 모두 웃었다. 홍재가 백민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신수가 훤하다. 완전히 미국놈 다 됐네. 살 만하냐?" "너도 한 달 후면 캐나다 갈 거라면서?" "어디 가서 처박히든 된장국이 수프 되겠냐. 젠장, 솔직히 안 가고 싶다." "가기 싫으면 그냥 있어. 니들 그렇게 하나 둘 떠나니까 정 말 허전해. 민호도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홍재와 백민호가 동시에 한준을 바라보았다. 홍재가 둘째 손가락을 세워 한준의 눈 앞에 대고 좌우로 흔들었다. "야, 괜히 사람 기대갖게 하지 마. 그 말 믿고 너한테 퍽 엎 어져버리면, 나 책임질 수 있어?" 정혜연이 보일 듯 말듯 눈살을 찌푸렸다. 오규섭이 말머리 를 돌렸다. "민호 너, 완전히 들어온 거야? 학교에서 교수 자리 준비해 놓고 기다린단 말이 있던데...." "사양했어. 두 달 있다가 다시 나가야 해." 한준은 백민호를 보며 고등학교 입학식날을 생각했다. S대 자연계 수석으로 진학하고, MIT에서 학위를 받는 등 그 입학 식으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는, 꽃다발을 받던 신 입생 대표 백민호의 예민하고 냉정한 얼굴 그대로였다. 그가 중 1 때까지 외국에 있었다는 것과 외무장관의 아들이란 것은 같은 반이 되고 나서 얼마 후에 소문으로 알게 되었다. 그런 배경 때문에 그는 주먹깨나 쓰지만 집안 형편은 불우한 아이 들의 표적이었다. 전교적으로 인기가 좋았던 한준과, 한준이 돕자 무조건 같이 도와줬던 주먹왕 홍재가 없었다면 무사히 졸업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선을 느낀 듯 백민호가 한준을 바라보았다. "저번엔 잘 들어갔어? 파티 끝나고 찾아보니까 벌써 가고 없던데." "응, 마감 때문에. 수당 오백 십원 더 받고 주간부 일까지 몸바쳐 충성하거든." "무슨 얘기 하는 거야?" 홍재가 어리둥절해하며 묻자 백민호가 대답했다. "하가 호텔 개관 리셉션에서 만났었어." "뭐, 하가 호텔? 야야, 마감도 쫓겼겠지만 한준이가 어떻게 그 자리에서 오래 개길 수 있냐? 멍석말이 안 당한 것도 하늘 이 도우신 거다." 한준이 웃으며 말했다. "안그래도 강 회장 비서실장이 엄청 인상을 구기고 있더라 구. 주위 시선 없었으면 살아 나오지 못했을 거야." 음식이 차려졌다. 홍재가 모두의 잔에 술을 채워주고 건배 를 했다. 오규섭이 백민호에게 물었다. "유재웅 박사도 왔었어?" 한준이 대신 대답했다. "홍재만한 덩치가 여자들 속에 파묻혀서 얼굴만 보이더라. 서른 셋 먹은 재벌 2세가 미혼이니 강영후 찜쪄먹는 아방궁에 살겠지." "사생활은 잘 모르겠지만 그 사람, 인술을 베푸는 의사야. 유 박사 덕택으로 어머 니 성일병원으로 옮겨서 이달 말에 신장 이식 수술 받으시게 됐어." 홍재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야, 진짜 잘됐다. 이제 고생 끝나셨구나." 한준이 물었다. "정신과 의사가 어떻게 어머니를 알게 된 건데?" "주치의하고 아는 사이더라구. 아무 조건 없이 도와주겠다 는 거야." 한준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으나 오규섭이 기분상해할까봐 가만히 있었다. 2년 전,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기 위해 귀국한 유재웅을 최 부장이 직접 인터뷰하여 특집으로 다뤘다. 그는 국내 유수 의 제약회사와, '성일聖日'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열 두 지역에 지원을 둔 종합병원을 소유한 의료재벌 유남권의 아들이었다. 어려서부터 미국에서 자란 그는 월반에 월반을 거듭해 스물 한 살에 존스 홉킨스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서른에는 최 면 의학의 톱 클래스로 인정받아 미국 정신의학 협회가 선정 한 정신과 전문의 십 걸 안에 들기도 했다. 한준은 그를 두꺼 운 안경을 낀 골샌님일 것으로 생각했다가 야성미가 물씬 풍 기는 얼굴을 하고있는 동물적인 근육질임을 보고 놀랐던 기억 이 있었다. "이거 의왼걸. 외아들 클럽 회장이 맘뽀를 그렇게 곱게 쓰 다니." 홍재가 웃으면서 말했다. 정혜연이 빈 와인잔을 밀어내며 한 마디 했다. "회장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그리고 그런 클럽이 있다는 것도 안 믿겨져." "외아들 클럽이라니?" "야, 넌 강영후를 그만큼 까발겼으면서 외아들 클럽도 몰 라? 기사 뭘로 썼냐?" "한준이가 어떻게 알겠어. 우리 학교도 아니었는데." 오규섭이 말했다. 홍재가 정혜연의 잔을 채워주며 킥킥 웃 었다. "그러게 공부 좀 할 것이지. 안 그래, 지진아 군?" "오빠는 체육 특기생으로 들어간 주제에 누구 말을 하고 있 어?" "넌 좀 가라니까 왜 여태 있는 거야?" "우리 대학 다닐 때, 입김 센 집 외아들 일곱 명이 결성한 클럽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어. 강영후하고 유재웅 박사도 회 원이라는 거야." 오규섭이 설명하자 정혜연이 옆에서 거들었다. "우리 학교, 강 선배 때문에 아즈테카 붐이었어요.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특히 대단했죠. 강 선배 유학간 후로 잠잠해졌지 만" 한준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아즈테카라면... 스페인 침입 전에 멕시코의 중앙고원에서 발달했던 문명 말이야?" "지진아가 역사공부는 좀 했네. 외아들 클럽이 그 시절을 그리워한대." "누가 퍼뜨렸던 험담인진 모르지만 정말 악질적이야. 있는 집 자식 질투하는 건 우리 오빠뿐 아니라니까." 한준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게 왜 험담이야?" "역사책 한 번 뒤져보세요. ...아즈테카의 주식이 사람고기였 던 건 알죠?" 한준은 좀 놀랐다. 강영후의 짐승 같은 눈이 머리 속을 스 쳤다. 확실히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인물 이었다. 안개 속의 어떤 것이 잡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즈테카라.... 그때의 심증은 아마 그런 종류의 것이었는지도 모 른다. 넉 달전, 한참 줏가를 올리고 있던 신인가수 남유미가 실종 되었다. 한 달 가까이 연락 한 마디 없이 집과 소속 프로덕션 에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녀를 보았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 었다. 경찰의 불평처럼 땅으로 꺼진 것이 아니면 하늘로 솟았 다. 털끝만한 단서도 남기지 않고 말 그대로 '증발'해버렸다. 그런 돌연한 실종은 2년 전, 최고의 영화배우로 군림하던 민 은정 사건 이후 두 번째였다. 그때도 수사는 미로 속을 헤매 다 7개월만에 '자살로 추정됨' 어정쩡하게 종결되고 말았었다. 민은정 때는 하늘이 무너진 듯 떠들어대던 매스컴이 남유미 에게는 이상하도록 냉담했다. 그대신 악성 루머만 무성했다. '남유미가 짧은 기간에 급성장을 할 수 있었던 건 다 까닭이 있는 일이다, 같이 안 잔 PD가 없다더라.' '야쿠자 현지처라 폭력배를 끼고 상습적으로 라이벌들을 해코지했다.' '원래 텍 사스촌 스타였는데 동남아 수출용 포르노를 몇 편 찍은 것이 어느 방송국 PD 눈에 띄어 발탁됐다.' '중증의 마약중독?히스 테리 환자여서 전신에 자해한 칼자국 등 흉터가 가득한데다 어디어디에는 어떤 문신이 있어서 항상 긴 옷만 입었다더라. 방송가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워낙 빽이 있어서 쉬쉬하며 덮어둔 것이다.' '타고난 색정광이라 데뷔 후로도 관계한 남자 명단이 대학노트 열 권 분량이다. 그 남자들 가운데 누군가한 테 살해당한 거다' 또는 '벌써 시체가 인수되었다' 등등. 누가 퍼뜨린 얘기인지는 연예계의 속성상 짐작 못할 것도 없었다. 한준 역시 그 사건을 배당받기 전에는 남유미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으나, 취재를 해 나가면서 그 소문의 터무니없음에 놀라고 말았다. 그녀는 마약중독자도 성격파탄자도 아닌, 그저 끼 있고 예쁜 여자일 뿐이었다. 특히, 그녀가 데뷔 후 사귄 남 자는 사회적으로 아주 유명한 유부남, 단 한 명이었다. 취재과 정에서 우연히 알게 된 바에 의하면 그 남자는 민은정이 실종 되기 직전의 연인이기도 했다. 민은정과 2년이 넘게 사귀었는 데도, 그 당시 너나 없이 시시콜콜히 까발려댄 민은정의 애정 편력 명단에서 빠져있었던 그는 하가 그룹의 후계자 강영후였 다. 한준은 복잡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마치 새끼줄이 떨어져있 길래 주워왔는데, 자세히 보니 그 끝에 소가 매어있더란 격이 었다. 상황에 따라서 호재일 수도 악재일 수도 있는 얘기지만 이 경우는 누구에게나 후자일 터였다. 어째서 매스컴이 남유 미를 내굴려버렸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풋내기 가수의 실종 쯤을 가지고 하가 제국에 덤벼들 바보는 없었다. 몰라서 못 쓴 것이 아니고 알면서도 덮어둔 것이었다. 부장은 대략의 추 이를 듣자 혀를 차더니 손떼라고 했다. 남유미에게 동정을 느 끼고 있었지만 한준 역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2주 정도 지났을 때, 한준은 구내식당에서 그녀 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옆집에 살던 친척은 주위의 냉대 를 견디다 못해 지방으로 이사갔고, 병석의 아버지는 딸의 일 로 충격을 받아 며칠 전에 사망하고 말았다고 했다. 게다가 소속 프로덕션에서 계약 파기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여 재 판 중이며 만약 패소하게 되면 가족이 모두 길바닥으로 나앉 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준은 밥맛이 싹 달아나 몇 입 뜨지 않 은 수저를 놓아버렸다. 그는 그날 퇴근하고 남유미의 집에 가 보았다. 골목을 돌아들다가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녀의 이층 집은 유리창이 모두 깨져 있었다. 대문 앞에는 쓰레기차가 부려놓은 것처럼 산이 되어 쌓여있는 오물로 발 디딜 곳이 없었다. 화장실에서나 볼 수 있을 만큼 지저분한 낙서들이 담벽을 뺑 돌아 붉은 스프레이로 도배되어 있었다. 도둑 고양이 한 마리가 잽싸게 지붕 위를 뛰어 달아났다. 악 취가 진동하는 괴괴한 골목은 마치 흉가를 연상시켰다. 한준은 충격을 받아 멍해진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런 짓을 한 건 어떤 사람들일까? 단지 가벼운 장난을 친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자, 다시 해보자. 처음 보는 남자가 모형 비행기를 줬고, 넌 나한테 혼날까봐 친구집에 숨겼어. 그 남자를 두 번째로 본 건 오늘 집 앞에서야. 엄마 불러내라고 윽박지르면서 널 때리 고 있을 때 아버지가 온 거다. 알았지? 넌 그거 외엔 아무 것 도 몰라. 누가 물어도 그렇게 대답해야 해. 나머지는 엄마가 알아서 할테니까... 알았지? 알았지? 그날 밤 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한 한준에게 전후사정을 전해들은 어머니는 주위를 살피 며 소리죽여 당부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정부가 남편을 살해 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사내는 뭐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태 도로 시종일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재판이 진행되어 가면서 어머니를 둘러싼 소문은 차마 들어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인 간이 어떤 동물인지 알고 싶다면 익명의 다수가 하나의 드러 난 표적에게 하는 짓을 보면 될 것이다. 한준은 어머니의 면 전에 대고 욕을 퍼붓던 사람들과, 강영후라는 이름에 겁먹어 서 진실을 회피했던 자신이 뭐가 다른지 생각했다. 한준은 집에 돌아가자마자 벽장을 뒤져서 남유미에 관한 자 료와 취재기록을 찾아냈다. 다음날부터 하루종일 경찰서로 법 원으로 쫓아다녔다. 가장 어려웠던 건 대인 노이로제에 시달 리는 그녀의 가족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강영후의 사생활은 문란하다는 말로는 모자랐다. 그는 2년 전 민은정이 증발하고 일 년도 채 안돼서 여당의 빅5 중 한 명의 딸과 떠들썩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에도 엽색행각 은 나아지지 않았다. 남유미 말고도 스무 명이 넘는 여자들이 있었다. 취재 중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그들 가운데 여섯 명 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이었다. 민은정?남유미와 마찬가지 로 '사라져'버렸다. '푸른 수염'이라는 한 마디가 한준의 머리 속을 맴돌았다. 자기 아내들을 죽여 한 방 가득 걸어놓았다는 프랑스 전설 속의 남자가. 민은정?남유미,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실종사건들과 강영 후를 묶은 원고에 <연속되는 인기 연예인들의 실종―범인은 '푸른 수염'?>으로 제목을 붙였다. 부장은 훑어보지도 않고 그 대로 쓰레기통에 처넣었다. "뭐하는 겁니까, 서 기자? 분명히 그만두라고 했죠?" "하지만 이런 일은..." "이거 보도 나갔을 때의 손익 계산서 따져봤어요? 이 바닥 물을 사 년 먹고도 아직 그만한 분별이 안됩니까?" 한준은 궁리 끝에 어차피 나가지 못할 바에는 다른 잡지에 라도 싣는 것이 낫다는 결론을 내리고, 월간 K사에서 데스크 버금 가는 파워를 가진 박상우에게 연락을 했다. 박상우는 원 고를 받아들고 한참 고민하다 내용의 가감을 자기 재량에 맡 기는 조건으로 수락했다. 며칠 후 국장이 낀 사석에서 한준은 지나가는 말로 그 이야 기를 했다. 국장은 불우했던 시절에 한준의 고모 서 사장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던 사람이었다. 다음날 한준은 국장실로 은 밀히 호출되었다. "다른 잡지에 넘기려니 속쓰리지?" "......." "도로 가지고 오게." 마감 하루 전이었다. 박상우는 하늘에 닿을 듯 펄펄 뛰었다. 최 부장은 이런 식으로 무시당하느니 깨끗이 사표 쓰겠다며 한 시간 동안 국장실에서 소리 질렀다. 결국 타협책은 민은 정?남유미 건만 남기고 다른 여자들의 실종은 잘라내는 것이 었다. 본격적인 문제는 기사가 나간 다음부터였다. 조금 과장하자 면 세상이 벌컥 뒤집혔다. 강영후의 캐딜락이 매일 시경 주차 장에 세워져 있고, 얼마 안있어 구속될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 다. 남유미의 전화가 회사로 걸려온 것은 발간 일주일 후였다. 편집실에 있던 기자 전원이 전화기의 외부 스피커를 통해 그 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어디 있는지 밝힐 수는 없지만 저는 잘 있어요. 강영후 씨는 제 문제와 무관합니다." 그리고 팩스 로 그날 신문을 손에 든 남유미의 사진이 전송되어 왔다. 이제는 한준이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할 차례였다. 그러나 강 영후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보복은 다른 방향에서 왔다. 광고주의 80%가 떨어져나간 것이다. 광고부에서 연일 비명이 터져나왔다. 하가 그룹이 잡지사 하나 비벼버리는 것 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준은 하루하루가 가시방석 같았 다. 동료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아서 노골적으로 싫은 소리 하 는 사람은 없었지만 가끔, "이거 괜히 독불장군 옆에 있다 하 루 아침에 쪽박 차는 거 아냐" 뼈있는 말들을 던지곤 했다. 계엄령은 한달만에 해제되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봐주 기로 한 모양이었다.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한준 은 가시방석보다 그런 식의 적선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강영 후는 결백하지 않다, 뭔가 큰 게 있다. 미심쩍은 점이 한두가 지가 아니었으나 심증만으로 우길 계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회원들 등에는 <태양의 돌> 문신이 있다는 거예 요." "응?" 상념에 잠겨있던 한준이 얼떨떨하게 반문하자 당장 홍재의 타박이 날아왔다. "지가 물어봐놓고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어? 기껏 얘기해주 니까..." "<태양의 돌>이라니?" "다른 말로는 아즈테카의 달력이라고도 해요. 아즈테카 문 화의 집약이죠." 백민호는 지겨운 듯 맞은편 벽에 걸려있는 대형 판넬을 보 고 있었다. 그의 기색을 눈치챈 홍재가 다른 화제를 꺼냈다. "야, 얼마 전에 책에서 본 건데 들어봐. 지구 탐사대가 적도 를 지나가다가 펭귄을 만났대. 탐사대장이 하도 이상해서 펭 귄한테 넌 왜 여기 있냐고 물어봤더니 펭귄이 뭐라고 한 줄 알아?" "홍재 있는 남극이 너무 추워서?" "전 살찐 제빈디유, 했대." 그것을 시작으로 각자 돌아가며 알고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 를 했다. 백민호의 차례가 되었다. 그가 웃음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야. 다섯 살 짜리 아이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사건이 있었는데, 관광객이 우연히 그 장면을 찍 게 됐어. 인화한 사진에는 떨어지기 직전의 아이와 그 엄마의 손이 찍혀 있었어. 법정에서 논란이 됐던 건 그 손이 아이를 붙드는 손이냐 떼미는 손이냐 하는 거였지. 그래서 사진을 130배로 확대해봤어. 결론은 떼미는 손이었어. 왜 그랬는지 알 겠어?" "왜 그랬는데?" "확대해본 아이의 눈에 웃고 있는 엄마의 얼굴이 비쳐져 있 었거든." 정혜연이 나지막하게 비명을 질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실화야?" "모르지. 전자공학과 BBS 유머 코너에서 본 거니까." 홍재가 탁자를 주먹으로 쳤다. "어떤 놈이 그딴 걸 유머라고 하는 거야?" "재밌잖아. 바람직한 성찰 아니야. 모성애 같은 건 없어. 모 성의 무의식은 매일 자기 애를 죽이면서 즐기고 있다구. 물론 의식하는 모성도 많고, 실행하는 모성 역시 셀 수 없지." "집어쳐, 임마. 입 다물고 술이나 퍼넣어. 넌 왜 가끔 가다 환자처럼 구냐?" 한준은 문득 고교 1학년 때 백민호의 집에 갔던 날을 떠올 렸다. 그가 이틀째 결석하고 있어서 한준은 집주소를 들고 물어 물어 문병을 갔다.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저택에 주눅이 들 고, 가족간의 온기라곤 털끝만치도 느껴지지 않는 집안 분위 기에 놀랐다. 한준을 맞아준 백민호의 새어머니는 이십 대 중 반이었다. 한준은 백민호를 좋아했지만 그의 집에는 두 번 다 시 가지 않았다. 열 한시 반이 지나자 홍재는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으로 취 해 있었다. 그는 느닷없이 한준을 끌어안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야, 서한준, 너 말이야! 딴 놈하고 자면 허리를 꺾어버릴 거야! 누구든 한준일 건드리는 놈은 다 죽인다! 알아들었어? 이 자식은 내 꺼라구!" 홀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이쪽을 보았다. 오규섭이 "지 갑이..." 하면서 탁자 밑으로 얼굴을 숨겼다. 백민호는 무표정 하게 홍재와 한준을 응시하고 있었다. "또 시작이군. 정말 역겨워 못 봐주겠어. 새언니 그러는 것 도 이해가 가." 정혜연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며 핸드백을 집어들고 나가 버렸다. "혜연아, 기다려. 바래다줄께." 오규섭이 비틀거리며 일어서다가 취기를 이길 수 없는지 다 시 주저앉고 말았다. 한준이 백민호에게 가보라고 하자 귀찮 은 듯 말했다. "알아서 가겠지." "지금이 몇 신줄 알고 그래? 따라가봐, 어서." 한준의 재촉에 백민호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일어나고, 오 규섭과 한준은 홍재를 부축해서 시선의 홍수 속을 걸어 나왔 다. 셋은 한준의 차를 탔다. 뒷좌석에 눕힌 홍재는 어느새 코 를 골고 있었다. 문을 열어준 건 홍재의 어머니였다. 한준은 그녀가 아들 집 에 이 시간까지 있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썰렁한 집에는 홍 재의 아내도, 돌쟁이 아들 윤수도 보이지 않았다. 오규섭이 차창을 내렸다. 밤공기가 제법 쌀쌀했다. 묵묵히 창 밖을 내다보고 있던 오규섭이 불쑥 말을 꺼냈다. "홍재, 캐나다에 혼자 간대. 이혼한다더라." "뭐, 정말이야? 왜?" "나도 잘은 몰라. 홍재한테는 그냥 모른 척해." 한준은 어안이 벙벙했다. 홍재네는 잉꼬 부부는 아니어도 그럭저럭 잘 꾸려나가고 있는 줄 알았다. 더구나 홍재처럼 사 람 좋아하는 녀석이 가족을 다 두고 혼자서 이민간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혜연이, 더 세련돼졌더라. 참... 그렇게 예쁘다니..." 오규섭이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자기만 보면 흰창을 치켜뜨 는 그녀를 좀 무서워하는 한준은 잠자코 있었다. 그만둬라. 걔 야 고등학교 때부터 민호한테 목매달았잖아. 한준은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십 년간 계속되어온 삼각관계는 백민호가 정혜연 에게 무관심했기 때문에 항상 모서리가 열린 상태였다. 한준 은 진심으로 오규섭이 승산없는 고생을 그만두기 바라지만, 쇠귀에 경읽기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오규섭을 집 앞에다 내려주고 차를 돌려 나왔다. 집에 들어 오니 새벽 두 시였다. 한준은 침대에 누워서도 한참동안 홍재 의 텅 빈 집을 생각했다. 막 잠이 들었던 한준은 전화벨 소리에 억지로 눈을 떴다. 침대 옆 테이블을 더듬어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예... 여보세요..."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즐거웠겠군, 쇼치필리." 한준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당신 누구야? 왜 자꾸 전화하는 거지?" "너하고 얘기하고 싶으니까... 그것뿐이야." "대체 내 생활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난 무엇이나 알고 있어. 내가 알고 싶어하는 것은 모두." "당신이 신이라도 된다는 건가?" "아니. 신은 너지, 쇼치필리." "장난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잖아?" "그래... 섹스하기에 적당한 시간이로군." "당신은 이런 게 재미있을지 모르겠지만 난 아니야. 그만 끊고 자라구. 그리고 부탁이니 다시는 전화하지 말아줘." "창 밖을 좀 봐. 달빛 때문에 눈이 멀겠어. 이런 날은 자면 안돼, 쇼치필리. 악몽이 널 죽일 거야." "...악몽이라고?" "그 꿈을 꾸게 되는 건 싫어. 불행한 일이 많이 일어나거든. 나하고 얘기해줘, 쇼치필리. 내가 잠들지 않게..." "왜 나를 그렇게 부르는 거야?" "...휴... 네 목소리를 들으면 금방 발기해버려. 페니스를 몇 번이나 빨아봤지? 셀 수도 없나?" 한준은 거칠게 뛰는 목줄기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그만둬. 끊겠어." "집적거리던 놈들이 몇 트럭은 됐겠지. 너는 날아가던 새도 뒤돌아볼 만큼 매력적인 녀석이니까 말이야.... 널 묶어놓고 질 리도록 올라타고 싶어." 한준은 수화기를 내던지고 전화코드를 뽑아버렸다. 지끈거 리는 머리를 누르며 자리에 누웠다. 갑자기 호출기가 자지러 지게 울어댔다. 한준은 비명을 지르며 호출기를 방 저쪽으로 내던졌다. 벽에 부딪친 호출기는 부서지는 소리를 내면서 바 닥을 굴렀다. ...흥분할 거 없잖아. 방법이 있을 거야. 그래... 아침에 생각 하기로 하고 ...으으... 제발... 그만둬. 기억하고 싶지 않아... 어 서 그만 두라니까! 제 4장 <핏빛 기억?Ⅱ> 대학 입학 후, 이틀 걸러 한 번 꼴로 계속되어온 각종 신입 생 환영회는 대개 새벽까지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한준은 아 홉 시가 지나자 있지도 않은 데이트 핑계를 대고 한창 흥이 오른 술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는 약간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 아왔다. 대강 씻고나서 막 누우려는 참에 전화벨이 울렸다. "이제 들어왔니? 내내 전화했는데 안 받더구나." 어머니였다. 술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 재혼한 남편의 직장 때문에 대전으로 이사한 이후로 근 3개월만이었다. 한준은 어 머니의 입장을 생각해서 집으로 찾아가거나 먼저 전화하지 않 았기 때문에 어머니쪽에서 연락을 해야 만날 수 있었다. "어디세요?" "이모 집이야. 오늘 자고 내일 일찍 내려가려구. ...지금 올 수 있겠니? 늦어서 안될까?" "곧 갈께요. 나와계시지 마세요." 열 시 삼십 분이었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집어들 었다. 어머니에게 학생증과 새로 산 교재들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어딜 가는 거냐?" 거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고모가 신발을 신는 한준을 불러세웠다. "앞에 잠깐요." "웬일로 일찍 왔나 했더니.... 지금이 몇 신 줄 알아?" "금방 올께요." 택시를 잡으려다가 지갑을 집에 놔두고 온 것이 생각났다. 주머니에 있는 돈은 300원 뿐이었다. 집에 또 들어갈 수가 없 어서 버스 정류장으로 뛰었다. 운 좋게도 금방 차가 왔다. 몇 명 되지 않는 승객들은 띄엄띄엄 앉아서 졸거나 창 밖을 내다 보고 있었다. 한준은 기사쪽으로 있는 좌석의 중간쯤에 가서 앉았다. 아버지가 돌아간 지 4년만에 어머니는 재혼을 했다. 고모는 어머니가 새남편과 살림을 차리기 며칠 전에 냉랭한 얼굴로 사람 둘을 데리고 찾아왔다. 그들이 한준의 짐을 챙길 동안 고모는 고개를 떨구고 있는 어머니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쓰다달다 말 한 마디 없이 현관에 서 있었다. 한준은 그 숨막 히는 침묵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하 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제발 그만두세요 고모. 어머니는 당신보다 훨씬 아버지를 사랑했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어머니도 살아야 하잖 아요. ...아버지를 죽인 건 어머니가 아니라 저란 말입니다. 한준은 앞으로 셋, 하고 정류장 수를 꼽았다. 무슨 얘기부터 하지? 학교 다니는 게 재밌어요. 아니, 사는 게 즐겁다고 할까? "야, 새꺄! 돈 그렇게 많이 벌었어? 타려는 게 안 보여?" 막 출발하려는 버스 앞을 한 무리의 청년들이 막아서서 고 래고래 악을 써댔다. 기사는 망설이다가 차를 멈췄다. 가죽점 퍼를 걸친 건장한 청년 예닐곱 명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그 중 몇이 운전석을 걷어차며 으르렁거렸다. "어유, 이걸 그냥! 뒈지고 싶어, 썅!" 기사는 아들뻘되는 청년들의 행패에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승객 몇이 재빨리 일어나 문 앞에 가 섰다. "조 마담년이 얼마나 잘 흔드는지 태석 형까지 맛이 갔더라 구. 그러니 그 색골 새끼가 돌지 않고 배기겠어." "배 중사 썅놈의 새끼, 눈깔을 파서 그 개년한테 씹게 해줄테다!" "잡자마자 허리를 꺾어놔야 해." "말 타기라면 환장하는데 병신 돼서는 어떻게 비빌까 좆 같은 새끼." 청년들은 자리에 앉거나 손잡이에 매달려 건들거리며 목청 껏 떠들어댔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시끄러웠다. 검은 오토바 이 장갑을 낀, 문쪽의 맨 앞자리에 앉은 청년이 소리쳤다. "야, 시끄럽다. 입들 다물어!" 잠시 후에 목소리를 낮춘 불평들이 이어졌다. "우리가 이게 뭡니까? 씨발 털털거리는 빤쓰나 타야 하구, 그 새낀 우리 돈 갖구 잘 빠진 씹구리 배때기 타고 있을 텐데 말이오." "꼭지 돌아 뻗겠습니다." "형님은 인격이 너무 높으셔서 골 친다니까." "닥치지 못해?" 검은 장갑이 뒤를 돌아보며 사납게 말을 막았다. 버스 안은 완전한 적막 속에 싸였다. 앞으로 고개를 돌렸던 검은 장갑이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한준을 똑바로 응시했다. 길게 찢어진 눈매가 한준을 한 차례 훑었다. 한준은 얼른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등골에 흐르는 식은땀이 선뜩했다. 검은 장갑을 낀 억세 보이는 손이 한준 앞 좌석의 손잡이에 놓였다. 다른 손으로는 창문 위의 손잡이용 긴 막대를 잡고 한준에게 바짝 붙어섰다. 한준의 앞뒷 자리들은 모두 비어 있 었다. 한준은 시선을 창 밖으로 향한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몇 시야?" 머리 위에서 강압적인 음성이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길게 찢어진 두 눈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계가 없는데요" "몇 시야?" "시계가..." 작게 말해서 못 들었나 싶어 다시 얘기하려는데 그가 잇새 로 침을 뱉었다. 바로 한준의 발 옆에 떨어졌다. 한준은 시선 을 내리깔았다. 그들이 들어올 때 다른 승객처럼 피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몇 신지 묻고 있잖아." "...열... 한 시 반이나..." "아니면 어쩔래?" "......." 그는 느닷없이 손을 뻗어 한준의 턱을 덜컥 밀어올렸다. 목 이 구십 도로 꺾여 좌석 뒤로 넘어갔다. 한준은 눈만 크게 뜨 고 있었다. "사람이 얘기할 땐 쳐다봐." "...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입모양으로만 대답했다. 그 손아귀 에서 풀려나고도 얼마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 정 류장에서 내려서... 두 코스 걸으면 되니까... 문득 어깨에 이상한 감촉을 느꼈다. 검은 장갑의 성기가 묵 직하게 눌러져 오고 있었다. 천천히 댔다가 떼는 행위를 되풀 이했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단단하게 고개를 쳐드는 그것은 점차 노골적으로 문질러지고 있었다. 끔찍이도 혐오스러웠으 나 고개를 돌릴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다음 정류장에서 승객들은 앞다투어 내렸다. 한준도 일어서 려고 하자 검은 장갑이 어깨를 내리눌렀다. "왜 일어서?" 흥분한 듯 들뜬 목소리였다. "...여,여기서 내립니다." "나 같은 인간 옆엔 있기 싫다 이거야?" "그게 아니라... 내려야 할 곳이라서..." "개소리 말고 앉아있어!" 청년들이 킥킥대는 소리가 들렸다. 버스는 그들과 한준만 남은 채로 출발했다. 한준은 떨리는 몸을 가누려 애를 썼다. ...어쩌지? 돈을 주면 될까? 지갑을 갖고 왔어야 하는 건데... "너 대학생이야?" 검은 장갑이 성기를 계속 문질러대면서 물었다. 한준은 퍼 뜩, 무릎 위에 얹어놓은 가방을 의식했다. 가방 안에는 학생증 과 주민등록증, 집 열쇠, 그리고 학생 수첩 갈피에 끼워놓은 어머니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의 일이 떠올랐다. 위험, 위험, 위험, 위험. 경보음이 머리 속을 가로질렀다. 그는 무의 식중에 가방을 감쌌다. "뭐야? 열어봐." "...책...밖에 없어요" "열라면 열어." 한준은 가방을 더 단단히 끌어안았다. "어쭈." 검은 장갑은 한준의 머리채를 잡아 옆 차창에 몇 차례 들이 박았다. 유리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검은 장갑은 그의 머리채를 잡은 채 버스 맨 뒤까지 질질 끌고 가서 긴 좌석 앞 자리에 앉았다. 그의 다리 사이로 엎드리는 듯한 자세로 쓰러 진 한준을 바짝 끌어당기고 머리채를 잡고 있는 손을 아래위 로 흔들어댔다. 잔뜩 부풀어오른 바지 앞섶이 한준의 입에 거 칠게 부벼졌다. "열어 봐." 검은 장갑이 빙 둘러서서 히죽거리며 구경하고 있는 청년들 에게 말했다. 한준은 가방을 잡아채려는 손들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순간 자신의 머리칼을 쥐고 있는 손에 생각이 미쳤 다. 그는 검은 장갑의 얼굴을 겨냥하여 힘껏 가방을 휘둘렀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한준은 갑자기 풀려났다. 얼굴을 감싼 장갑을 타고 피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한준은 출입문으로 달 려갔다. "차 세워 주세요! 어서요!" 백미러를 통해 보고 있던 기사가 급제동을 걸었다. 그 바람 에 쫓아오려던 청년들이 우르르 나동그라졌다. 한준은 밤거리를 정신없이 달아났다. 청년들이 버스에서 뛰 어내렸다. 요란한 구둣발소리가 인적이 끊긴 거리를 울렸다. 추격자들의 숨결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무 한 그루 없 는 삭막한 정글이었다. 사냥꾼들은 짐승을 몰고 있었다. 그들 은 사냥감을 포획하여 실컷 희롱하고 즐길 생각으로 흥분해 있었다. 한준은 자꾸만 다리가 허청거렸다. 바로 등 뒤에서 거친 숨 결을 느꼈다. 그는 넘어지면서 가방을 놓쳤다. 공포가 온 몸을 오그라들게 했다. 건너편 도로에 경찰 순찰차가 주차해있는 것을 발견한 건 바로 그때였다. 한준은 도와달라고 고함을 질 렀다. 그러나 입에서 나온 건 짐승의 찢어질 듯한 울부짖음이 었다. 경찰관 하나가 운전석 문을 밀고 나왔다. 한준은 청년들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듣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낸 짐승의 소리에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저만치 뒹굴고 있는 가방이 보였다. 가방 모서리를 싸고 있는 쇠붙이에 피가 묻어 있었다. 버스정류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가 반색을 하면 서 달려왔다. "왜 이렇게 늦게 오니.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어." "나와계시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 밤, 어머니 옆에 누운 한준은 한잠도 자지 못했다. 약한 짐승이 되어 쫓기던 자신이 뇌리에 달라붙어 떠나지 않았다. 인간들과 산다는 것이 너무도 무서웠다. 한준은 서점의 사회과학 신간 코너에서 무엇을 살지 고민하 고 있었다. 사고 싶은 책은 다섯 권인데 수중에 있는 돈은 차 비 제하면 두 권 값 밖에 되지 않았다. 다시 첫 권부터 들춰 보았다. "여어, 대학생. 엄마가 아주 미인이더군." 어깨 너머로 여유있는 음성이 들려왔다. 검은 오토바이 장 갑을 낀 손이 한준의 허리에 둘러졌다. 한준은 옆구리를 눌러 오는 금속의 감촉을 느꼈다. "나도 이 칼날이 펴지지 않길 바래. 가방에 긁힌 훈장 따위 를 달고 다니게 될 줄은 미처 몰라서 기분이 많이 더러워져 있거든. 네 옆구리로 창자가 흐르는 것도 보고 싶긴 하지만 그러기 전에 먼저 너하고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한준은 그의 이마에서 왼쪽 뺨으로 길게 그어진 흉터를 보 았다. 검은 장갑은 친한 사이인 것처럼 웃으며 한준을 끌어안 고 서점을 빠져나왔다. 한준은 인도 옆에 세워져있던 차 속으 로 밀어넣어졌다. 검은 장갑이 보닛 쪽으로 돌아 운전석에 들 어오려 할 때 문을 밀어젖히고 뛰쳐나왔다. 어느새 따라붙은 검은 장갑이 한준의 팔을 나꿔챘다. 한준 은 뿌리치려고 버둥거리며 목청껏 소리를 질렀으나 사람들은 멀찍이 서서 지켜보고만 있었다. 한눈에도 표가 나는 일류급 주먹과 말썽을 일으키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검은 장갑은 상대를 무력하게 만드는 방법을 백 가지쯤 알고 있었다. 그는 주먹을 휘둘러대는 한준의 목 양쪽의 급소를 잡 고 무릎으로 명치를 찍었다. 계속해서 끊어지는 호흡으로 얼 굴이 새파래진 한준을 차 안에 던져넣으며 나직하게 내뱉었 다. "깜찍하게 구는군. 어디 또 한 번 해보시지. 발목뼈가 박살 나면 얼마나 아픈지 가르쳐 줄 테니까." 차는 한 시간쯤 달려 문래동의 외진 뒷골목으로 들어서서, 폐쇄된 공장인 듯한 건물 안에 멈췄다. 지하의 넓은 창고는 철제 계단을 통해 일층과 연결되어 있고, 일층의 큼직한 시멘 트 기둥 뒤에 잘 꾸며진 방이 있었다. 한준은 침대로 내던져졌다. 검은 장갑이 문을 닫고 바지지 퍼를 내리면서 한준에게 다가왔다. "니 에미 대전에 살지? 젊은 서방하고 재미가 좋은가 보던데." 한준은 전율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잔뜩 성이 난 물건이 한 준을 향해 뻗어 있었다. "정성들여 빨아. 고분고분하게 구는 게 여러 사람을 위해서 좋을 거야. 특히 니 에미한테 말이야." 그는 한준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성기를 입안에 밀어넣었다. 한준은 몸서리를 쳤으나 감히 뱉어내지는 못했다. 그랬다간 이 미친 자식이 자기뿐 아니라 어머니에게까지 어떤 해코지를 할 지 알 수 없었다. "나도 쓸 만한 집구석에서 나왔으면 너 같은 새끼보다 훨씬 잘됐어. ...씨팔, 엿 같은 세상. 넌 나보다 많이 누렸으니 내 좆 좀 빤다고 억울할 건 없잖아?" "형님, 배 중사 새끼 말인데요" 청년 하나가 방문을 벌컥 열고 달려들어오다가 찔끔해서 멈 춰섰다. "그 새끼가 뭐?" "저기, 청주의 넙치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조 마담년하고 골 프장 계약하러 온 걸 봤답니다." 검은 장갑은 한준의 머리를 더 바짝 끌어당겼다. "그럼 태석이한테 연락해서 그 일대 꽉 조이라고 해라. 연 놈을 같이 잡아야 해." 청년이 나가자 검은 장갑은 한준을 엎드리게 했다. 타액으 로 흠뻑 젖은 성기가 한준의 몸 속 깊이 파고들어왔다. 한준 은 이를 악물고 비명을 삼켰다. "내일 이 시간에 와, 알았어? 일 분이라도 늦었다간 다시는 네 이쁜 엄마를 못 보게 될 거야." 검은 장갑은 몇 시간 후에 한준을 놓아주며 말했다. 한준은 다음날부터 매일 저녁 일곱 시에는 어김없이 그 방에 있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검은 장갑은 전날부터 계속 한준을 붙들어놓고 있었다. 밤새도록 시달리다가 새벽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한준은 밖에서 들려오는 심상치 않은 소리에 깨어났다. 오 후의 햇살이 창문에 비스듬히 드리워져 있었다. 비명과 흐느 낌, 윽박지르는 듯한 고함... 문을 열자 그 소리는 더욱 또렷하 게 잡혔다. 한준은 기둥 뒤에 서서 아래층 창고를 내려다보았 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탁자에 누운 채로 묶여있는 알 몸의 여자였다. 초점없는 눈을 멀거니 뜨고 있었다. 얼굴이 눈 물줄기를 따라 번진 마스카라로 얼룩덜룩했다. 탁자 밑으로 늘어져있는 미끈한 두 다리를 타고 정액과 피가 줄지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검은 장갑 좌우로 청년들이 늘어서고, 그 앞의 나무걸상에 알몸인 사내가 결박되어 있었다. 사내는 전신에 피가 말라붙어 있고 얼굴은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뭉개졌 다. 사시나무처럼 떨면서 흐느끼고 있었다. "이런, 쯧쯧.... 천하의 배 중사가 꼴이 말 아니군. 형제들 돈 을 가로채서 한 번 멋지게 살아봤으면 됐지 무슨 미련이 아직 도 남았어? 설마 날 그만큼 웃음거리로 만들고도 살길 바라는 건 아닐 테고." 검은 장갑이 잔인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사내는 터져서 피가 흐르는 머리를 수도 없이 조아리면서 울음섞인 목소리로 애걸했다. "요, 용서하십시오 형님! 제가 잠시 눈이 뒤집혀서... 두 배, 아니 열 배로 갚겠습니다" "듣기엔 좋은 소리다만 어떻게 갚을 거냐? 저 년 팔아서?" "무...무슨 수를 써서라도..." 청년 하나가 사내의 면상을 냅다 걷어찼다. 코인지 입인지 알 수 없는 부분에서 핏덩어리가 튀었다. 검은 장갑이 손을 내밀자 뒤에 서있던 청년이 단도를 건넸 다. 검은 장갑이 일어서서 사내에게 다가갔다. "저승에 가서도 다시는 계집한테 미쳐서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 없을 거다. 모든 화의 근원이 되는 좆부리를 끊어줄 테 니까." "살려주십시오 형님! 은혜는 반드시 갚겠습니다! 형,형님!" 검은 장갑은 한 손으로 사내의 음낭과 남근을 쥐더니 단칼 에 잘라냈다. 사내가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검은 장갑은 잘 라낸 살덩어리를 사내의 입 속에 틀어넣었다. 나무의자가 한 순간에 피로 물들었다. "처리해." 검은 장갑이 손에 묻은 피를 닦으면서 명령했다. 청년 하나 가 벽에 걸려있던 갈고리를 벗겨 들었다. 한준은 갈고리가 여 자의 정수리를 찍기 직전 얼굴을 가렸다. 두개골 부서지는 소 리가 창고 안을 울렸다. 검은 장갑이 들어왔을 때 한준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는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한준 위로 몸을 겹쳤다. 비릿한 피내음이 풍겨왔다. 검은 장갑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한준의 뺨을 핥았다. 일주일 후, 검은 장갑은 논현동의 룸싸롱에서 인사불성으로 취한 채 체포되었다. 그 부하들도 속속 잡혀들어갔다. 그들은 다른 피의자들과 함께 매직 미러가 설치된 조사실에서 건너편 방의 한준에게 확인되었다. 한준은 검은 장갑의 조직원들을 하나씩 손으로 가리켰다. 갑자기 검은 장갑이 킬킬거리고 웃었다. 그는 한준을 똑바 로 바라보고 있었다. 보일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준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것은 아버지를 찌르기 전에 사내가 보였 던 웃음과 오싹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 "어머니, 저예요." "오, 그래, 한준아. 네가 먼저 전화를 다 하고, 무슨 일이라 도 있는 거냐?" "...일은요." "고모님은 편안하시니? 학교도 잘 다니고?" "다 좋아요. 저... 그냥 여쭤보는 건데요, 혹시 누가 쫓아오 거나 집 주위 서성거리거나 하지 않죠?" "아니. 왜?" "아니면 됐어요. 별 뜻이 있는 건 아니고... 어머니 잘 지내 시나 해서요." "다 늙은 아줌마 누가 채가기라도 할까봐? 내 걱정은 말고 너나 몸 건강히 지내라. 내달 초에 한 번 올라가마." 대전 경찰서에서 연락이 온 것은 그 다음날 밤이었다. 경찰관이 흰 천을 걷었다. 뭔지 알 수 없는 고깃덩어리 위 에 어머니의 얼굴이 얹혀 있었다. 누군가가 한준을 부축해주 었다. 한준은 그 자리에서 토하기 시작했다. 출장 중이던 어머니의 남편이 뒤늦게 달려왔다. 경찰관은 시신을 확인해야겠다는 그를 만류했다. "확인은 아드님이 했습니다. 시신의 상태가 아주 그... 충격 적이라서... 정신병자가 아니면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을 겁니 다. 보시지 않는 편이 나아요." 제 5장 <다가오는 그림자?Ⅰ> 한준은 출근하자마자 자료실로 가서 아즈테카에 관련된 서 적들을 대출했다. 커피를 한 잔 뽑아놓고 밑줄을 그어가며 자 세하게 읽어나갔다. ≪......중앙 멕시코에서 인신 공희 의식이 일반적으로 나타 나는 것은 어둠의 신 테스카틀리포카의 영향이다. 아즈테카인 은 정치적 실력을 증대시키고 부를 축적할수록 신들을 위한 웅대한 신전을 증축하고 더 많은 인간을 산 제물로 바쳤다. 이들은 아즈테카의 지배하에 있는 많은 도시와 부족들로부터 차출되었으나, 점차 그 정도의 공급으로는 부족할 만큼 인신 공희 행사의 규모가 거대해졌다. 1450년경 심한 기근이 닥쳐 오자 아즈테카인은 그 재앙이 산 제물의 수가 부족해서 발생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에 떨다가 충분한 포로를 확보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이것이 <꽃의 전쟁>이다. 그 결과 1487년 아즈테카 왕국의 중심 테노치티틀란에 대신전이 완성되었을 때는 2만 명의 심장이 도려내져 태양을 위해 바쳐 졌다.≫ 한준은 <꽃의 전쟁>에 진하게 밑줄을 그었다. 그 줄을 몇 번 반복해서 읽었다. 확 끌리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어쩐지 그 단어에서 강영후와 관련됐던 여자들의 실종이 연상되었다. 몇 페이지 뒤에 <태양의 돌>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는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림문자와 기호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는 거대한 원판이었다. ≪<태양의 돌>의 중앙에는 태양신 토나티우의 얼굴이 있 다. 그는 독수리 발톱 같은 손을 뻗어 사람의 심장을 움켜쥐 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토나티우는 매일 일출시 태어나고 일몰시 죽어야 하는 고 통과 창공을 가로질러 날아가야 하는 두려운 여행으로 항상 위협을 받고 있는 신이었다. 다른 신들은 그의 힘든 임무를 격려하기 위해 그에게 자발적으로 제사를 올렸다. 원기를 잃 은 태양이 또다시 독수리가 되어 비상하여 삼라만상에 빛을 주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심장으로 양분을 보충시켜야 한다. 토나티우 숭배에는 사람의 심장과 피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것은 토나티우에게 활력을 주어 세계의 안전과 영속을 보장 했다. 아즈텍 족은 우주가 지금까지 네 번의 주기를 거쳐왔다고 믿고 있었다. 네 개의 태양이 차례로 탄생하여 멸망해갔다. 제 1의 태양(재규어의 태양)은 재규어에게 잡혀먹혔고, 제 2의 태 양(바람의 태양)은 폭풍에 날아갔고, 제 3의 태양(火雨의 태 양)은 화산의 용암에 의해 멸망했으며, 제 4의 태양(물의 태 양)은 대홍수로 사멸했다. 현재는 제 5의 태양, 즉 올린토나티 우(지진의 태양)의 시대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언젠가는 멸망 한다. 이 태양의 파멸은 지진에 의해 초래된다. 만일 한밤중에 별의 운행이 중지된다면 태양은 힘을 잃고 다음날 아침 떠오 르지 못할 것이며, 별은 수많은 맹수가 되어 지상으로 내려와 인간을 모두 잡아먹을 것이다.≫ 아즈테카의 신화를 읽다가 한준의 시선은 한 줄에 붙박혔 다. 그는 형광펜으로 천천히 그 문장을 그었다. ≪쇼치필리, 즉 꽃의 왕자는 꽃과 사랑의 신이다. 젊음과 사랑, 아름다움을 관장한다.≫ 오후 시간으로 접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대학후배인 최 나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서한준 기자 좀 부탁합니다." 얌전을 빼면서 말하는 목소리에 한준은 실소했다. 한국통신 본사 생활 3년만에 전화 예절을 배운 모양이었다. "그분께서 받고 계십니다." "어머, 준이 형이었어? 근데 형 왜 나 푸대접해? 삐삐쳐도 모른 척하구?" "내 삐삐 오늘 새벽에 사망했어." "뭐 좋아. 믿어주지 까짓거." "잘 지내?" "그럭저럭. 불면증 때문에 병원 다니는 거 빼면." "어느 병원 다니는데?" "서울 병원이라고, 우리 회사 옆에 있어." "심각해?" "많이 좋아졌어. ...형, 이번 주 토요일 다섯 시에 <재즈재즈 > 병아리들 환영회 한대. 초대회장께서 불참하셔서야 말이 안 되지?" "초대회장은 무슨. 최나미 깡패한테 떠밀려서 엉겁결에 쓴 감툰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예나 지금이나 난 열렬한 재즈 혐오자라구." "전시효과란 엄청 중요한 거야. 형 같이 잘 빠진 미모가 행 렬의 선두에 서있어야 재즈 인구가 늘어난다니까. 그러니 그 날 결혼하는 것만 아니면 열일 제쳐놓고 오란 말야." 한준은 문득 '토나티우'를 생각했다. 그는 아즈테카의 기록 을 읽은 후부터 메탈 베이스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안그래도 너한테 연락하려고 했어. 물어볼 게 있는데..." "결혼하자구?" "장난 전화를 어떻게 혼내줄 수 없을까? 예를 들면 상대방 의 전화번호를 알아낸다든지 해서." "그거라면 155 발신 전화번호 확인 서비스가 있어. 형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만든 상품인데, 전화벨이 울리고 수화기를 들기 전 4초 내에 상대방의 전화번호를 알아낸다구." "얼마나 정확해?" "나 참, 조국의 통신기술을 뭘로 보는 거야. 정확도 99.9% 야. 왜, 빚쟁이가 사람 사서 들볶아?" "그런 건 아니고...." "관할 전화국에 가서 신청하면 돼. 근데 조건이 상당히 까 다로워. 뭐냐면..." "서류니 증명이니 떼고있을 시간 없어. 어떻게 오늘부터 좀 안될까? 꼭 필요한데." "뭐야, 직권 남용이라도 하라는 거야? 내 직업 양심을 뭘로 보고.... 그건 그렇고, 형 남영동이지? 내가 먼저 전화해놓을 테니까 형 이름 대고 영업부 창구과 조 과장을 찾아. 전화번 호 부를 테니까 받아적어." 한준은 백민호가 왜 최나미와 끝냈는지 아직도 알 수가 없 었다. 그녀는 한준이 아는 중에서 제일 성격이 좋은 여자였다. 한준이 시켜준 소개팅으로 만난 그들은 한동안 잘 지내는 듯 했으나 백민호가 유학간 후 일 년이 못되어 깨지고 말았다. 최나미는 지금까지 혼자 살고 있었다. 백민호가 귀국한 걸 알 고 있을 텐데도 한준에게 한 마디 내색하지 않는 것은 그녀로 서는 대단한 인내였을 것이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최나미였다. "시험 작동 해봐. 내 전화번호 알지?" 155를 돌렸다. 자동응답이 최나미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대단한데." 한준은 최나미에게 전화해서 감탄의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고 했잖아. 빚쟁이 많이 혼내줘. 참, 새내기 환영회 때 꼭 와야 돼?" 그 후로 다섯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자동응답은 그 번호들 을 틀림없이 되풀이했다. 한준은 새벽 한 시까지 기다렸으나 토나티우는 전화하지 않았다. 한준은 좀 실망하여 잠자리에 들었다. 기자실 문 앞에서 황 계장이 한준을 불러냈다. "커피 한 잔 하겠나?" "커피로 배불렀습니다." 황 계장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들고 한 모금 마셨다. 한 준은 눈 밑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그의 푸석푸석한 얼 굴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중소기업들 여전히 힘든 모양이던데 고모님은 어때?" "그만그만한가봐요." "건강은 좋으시고?" "고모야 고모부만 회춘하시면 애도 낳으실 체력이죠." 황 계장은 한참 주식시세니 정부시책이니 이상기온이니 등 등을 늘어놓았다. 한준은 그가 언제까지 말을 돌리고 있으려 나 꾸준히 기다렸다. 황 계장은 왼손 약지에 낀, 루비가 박혀 있는 금반지를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가 결혼반지를 쥐어뜯을 때는 초조하거나 무언가를 망설일 때였다. 잠시 말 없이 앉아있던 황 계장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시경에 가봐야겠어. 다음에 또 보세." "저도 회사로 들어가야 합니다. 한 정거장 거리니 좀 태워 주시죠. 제 차는 엔진 튠업하려고 정비소에 맡겼거든요." 한준은 냉큼 따라나섰다. 황 계장이 그만큼 뜸을 들이는 것 은 뭔가 굉장히 큰 것이 있다는 얘기였다. 차 안에서는 침묵이 계속되었다. 황 계장은 목덜미를 몇 번 주먹으로 두드렸다. 봄날 오후의 거리에는 화사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이번 사건은 감이 안 좋아." 황 계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한준은 바짝 긴장하며 귀를 기울였다. "이 생활 삼십 년이지만 이렇게 불안하긴 처음일세. 서 군, 이건 철저한 비공개 수사인 걸 명심해야 해. 아직은 누구한테 도 발설해선 안돼. 자네한테 얘기하는 건 자네를 믿기 때문이 야. 그리고... 혹시 내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서니까" "알겠습니다." "사람들이 없어지고 있네. 하루 아침에 감쪽같이 사라져버 리는 거야. 2년 전 3월 제주도에서 시작된 후로 지금까지 249 명째네." "실종 사건이라면 하루에도 몇 십건씩..." "아니, 이건 특징이 있어. 이,삼십대 남녀가 대상이고, 실종 자의 집에서 문자가 새겨져 있는 명함크기의 순금판이 발견된 단 말일세. 그것도 홀연히 어디서 솟아난 것처럼 말이야." "그런 일이 있다면 언론에 알려서 시민들도 자구책을 강구 하도록 해야지 않습니까." "안돼. 득보다 실이 너무 많아. 이젠 대충 윤곽이 잡히긴 했 는데 그게..." 한준은 문득 민은정의 실종 역시 2년 전 6월에 일어났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꽃의 전쟁인가?" 한준은 별 생각 없이 중얼거렸다. 갑자기 차가 찢어지는 소 리를 내며 도로 한복판에 급정거했다. 한준은 앞창에 머리를 받을 뻔했다. 황 계장은 두 눈을 부릅뜨고 한준을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나?" "제가 무슨..." "혹시, 꽃의 전쟁이라고 했나?" "예? 예...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뒤에 늘어선 차들이 경적을 울려댔다. 황 계장은 그제서야 정신이 든 듯 차를 출발시켰다.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어?" "요즘 아즈테카에 좀 관심을 가지게 돼서요." "어째서?" "친구들한테서 강영후가 그 문화에 심취해 있었단 얘기를 들었거든요." 황 계장은 말이 없었다. "물론 정확한 건 아니구요. 소문으로만..." "강영후 뿐 아니고 외아들 클럽 전체가 그렇네." "그 클럽, 정말 있는 겁니까?" "제일 유력한 용의자들이야. 아직 여섯 명 전원은 파악하지 못했지만 곧 밝혀질 거야." "일곱 명이라던데요." "아니, 여섯일세. ...아까 문자가 새겨진 순금판 얘기를 했 지? 그 문자는 유토―아즈테카 어족에 속하는 나와틀어라네. 뭐라고 새겨져 있는지 알겠나?" "뭡니까?" "쇼치야 오요틀... 꽃의 전쟁." 한준은 앞머리를 몇 차례 쓸어올렸다. 둘은 입을 다물고 각 자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먼저 입을 연 쪽은 한준이었다. "그렇다고 외아들 클럽만 의심할 순 없어요. 아즈테카 신봉 자는 그들 말고도 꽤 있는 것 같으니까요. 토나티우만 해도 절 쇼치필리라고 부르거든요." "토나티우? 태양신 말인가?" "아뇨. 저한테 장난전화하는 녀석에게 붙여놓은 별명이죠. 목소리는 근사한데 좀 이상한 친굽니다." "그 전화는 언제부터 걸려왔나?" "그게... 아, 한 열흘쯤 됐겠군요. 하가 호텔 개관 리셉션 있 던 날부터니까..." 말을 하다 말고 뭔가 깨달은 한준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황 계장도 같은 생각인 듯했다. "목소리가 근사하다고 했나? 구체적으로 어떻지?" "...굉장히 저음에 약간 금속성이 섞인... 적절하게 표현할 말 이 없는데요." "성적인 느낌인가?" "옛? ...그,그렇죠." 황 계장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최악이로군." "짚이시는 데가 있습니까?" "녹음해뒀나?" "아마 응답기 테이프에 남아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게... 아, 저기 좀... 듣기 거북한 내용이라" "음성분석을 해봐야 하네. 부탁하세." 아파트 앞에다 차를 대놓고 기다리는 황 계장에게 테이프를 줄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황 계장은 서둘러 차를 돌려 나 가고, 뒤에 남은 한준은 택시를 잡아타고 잡지사로 향했다. 남 대문 일대부터 길이 꽉 막혔다. 촌각을 다투어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충정로에 내려서 걷 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올려다본 하늘은 파랗게 높아보였다. 해가 떨어질 때까지 걷고 싶을 만큼 화창한 날씨였다. 청색 캐딜락 한 대가 한준을 따라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 시하던 한준도 점차 신경이 쓰였다. 안을 들여다보려고 했으 나 짙은 썬팅을 입힌 차창은 한준의 모습만을 되비추었다. 캐 딜락은 천천히 한준을 앞질러 멈춰섰다. 뒷좌석의 창문이 내 려갔다. "타겠소?" 강영후가 말했다. 한준은 뜻밖의 만남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강영후의 미소 를 피해서 눈길을 돌렸다. 열린 창문을 통해 그의 옆에 앉아 있는 남자의 하반신이 보였다. "잡지사 가는 길인 모양인데 타요. 나도 거기 지나니까." 강영후의 목소리는 맑고 울림이 깊은 중저음이었다. 한준은 마음 속으로 토나티우 용의자 명단에서 강영후를 지웠다. "됐습니다. 개의치 말고 가시죠." "이거 섭섭하군요, 서한준 씨." "바빠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별로 바빠 보이지는 않은데 말이오. 예의를 갖추는 것이 좋아요." "하, 예의라? 그 기사 봐준 걸로 지금 공치사 하는 겁니까?" 강영후가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한준을 한 차례 훑어보 았다. "봐주다니, 내가 언제 널 봐준다고 했어?" "......." 한준은 무의식중에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는 걸음을 빨리 해서 캐딜락 옆을 벗어났다. 강영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중얼 거렸다. "내가 심장을 꺼내서 핥을 때도 건방을 떨 수 있을지 궁금 하군 그래." "서한준만은 건드리지 마. 너하고 싸우고 싶지 않아." 옆자리에 앉아있던 남자, 위치로포치틀리가 말했다. 한준이 잡지사로 들어가 일을 마저 보고 귀가했을 때는 밤 열 시가 좀 지나 있었다. CD를 고르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 렸다. "내가 그리웠나, 쇼치필리?" 메탈 베이스가 다정하게 물었다. 한준은 가슴이 철렁했으나 곧 155를 기억했다. 그는 느긋하 게 소파에 앉았다.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한 일 인지를 실감했다. "그래. 며칠간 당신이 전화하지 않으니 기다려지더라구. 바 쁜 일이라도 있었어?" "듣기 좋은데. 오늘은 기분이 괜찮은가보군." "잠깐만 기다려. 불 위에 뭘 좀 얹어 놓아서 말이야. 내가 다시 전화하지." 한준은 전화를 끊고 155를 돌렸다. 자신의 전화를 받고 당 황해할 토나티우를 생각하니 기대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동응답이 들리지 않았다. 먹통이었다. 잘못 걸었나 싶어 끊고 다시 해보려는 순간, 몇 천개의 칼로 철판을 긁는 듯 끔 찍한 소음이 터져나왔다. 뇌가 꼬챙이에 꿰뚫리는 것 같은 느 낌이었다. 한준은 양쪽 귀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바닥을 굴렀 다. 전신에 경련이 일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그 소리는 거짓말처럼 모든 고통을 몰아 내 주었다. 한준은 땀으로 젖은 손을 들어 간신히 수화기를 집어올렸다. "다시 전화한다더니 어떻게 된 거야?" 메탈 베이스는 웃고 있었다. "좀 아팠지? 그러게 왜 쓸데없는 짓을 해. 내게 대들면 다 치는 건 너야, 쇼치필리." "...당신... 대체 누구야?" "글쎄, 누구지? 한 번 맞춰보라구." "...토나티우." 그가 소리내어 웃었다. 부드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틀렸어. 토나티우는 영후 녀석이야." 한준은 숨을 멈췄다. "...강영후?" "그 녀석은 널 증오해. 이번 제사의 주 제물로 너를 받고 싶어하지. 네 눈을 보면서 직접 가슴을 갈라주겠다는 거야." "당신... 외아들 클럽인가?" "그 명칭 별로 마음에 안 드는군. 왜들 그렇게 부르는지 모르겠어." "꽃의 전쟁을 하고 있는 게 당신들이야?" "후후... 이제 그만 자도록 해." "왜 대답을 안하지?" "쇼치필리, 넌 내가 셋을 셈과 동시에 잠이 들어서 내일 오 후 두 시에 깨어나게 된다. 깨어나서는 매우 여유롭고 편안한 기분이 들 거다. 그리고 한 시간 후에 다시 잠이 들어서 밤 열 한시에 깨어난다. 좋아... 이제 네 몸은 지극히 평화로워졌 다. 하나―둘―셋." 수화기가 한준의 무릎으로 떨어졌다. 한준은 소파에 기댄 채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한준은 눈을 깜박이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닿은 다리가 따뜻했다. 벽시계는 두 시를 가 리키고 있었다. 그는 창문을 열어젖혔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가 바람을 타고 올라왔다. 전화벨이 계속 울렸으나 신경쓰지 않았다. 아마 회사에서 오는 전화일 것이다. 무단 결근을 했으 니 꽤 시끄러울 테지만 왠지 조금도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 는 지난 밤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소음은 대체 무엇이 었을까. 토나티우가 전화해주지 않았다면 밤새도록 경련이 멈 추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최나미가 가르쳐준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조 과장이 직접 받았다. 한준이 이름을 밝히자 반갑게 인사를 했다.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저, 어젯밤 열 시 삼십 분쯤에 전화 가 두 통이 왔는데 같은 곳입니다. 그 번호 좀 알 수 있을까 요?" "전산실에 들러보고 곧 연락드리죠." 조 과장의 전화가 온 것은 이십 분쯤 지나서였다. 그는 당 황한 듯 말을 더듬고 있었다. "정말 이상하군요.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는데..." "뭐가 잘못됐습니까?" "두 차례 모두 유선 통화 기록이 남아 있는데 번호를 알 수 가 없어요. 원인을 조사하고 있으니 해결이 나는대로 연락하 지요." "어제 좀 이상한 일이 있었는데... 서비스 음성이 가끔 귀청 이 터질 것 같은 소음을 내기도 합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어떤 경우라도 소음은 내보내지 않습니다." 한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도 별 다른 느낌이 없었다. 왜 놀 라지 않지? 아까부터 왜 이렇게 마음이 편한 거지? 그는 토나 티우가 했던 말을 생각했다. 갑작스러운 수면과 지금의 편안 한 기분은.... 그래, 최면술이구나.... 한준은 하늘을 보다가 세 시를 알리는 뻐꾸기 소리와 함께 다시 잠이 들었다. 한준은 소스라쳐 깨어났다. ...동딩동딩동딩동딩동... 초인종 소리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거실에 누워있다는 것을 깨닫 는 데는 짧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문 앞에는 황 계장과 낯선 사내 하나, 그리고 윤성렬 형사 2부 부장검사가 서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자네. 검찰청에 오지 않아서 연락해보니 출근도 하지 않았다 하고, 집 전화도 안되고."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먼저 인사해. 이 사람은 우리 수사관이네. 영감님은 알 테 고..." 황 계장이 소개한 사내는 손을 내밀며 "김환이요" 짧게 한 마디 했다. "자네한테 먼저 허락을 받으려고 했네만 오늘 자네 사정이 그래놔서" "허락이라니요?" "자네 전화를 감청해서 그 토나티우라는 친구의 발신지 추 적을 해보려고 하네. 협조해주겠나?" 한준은 시계를 보았다. 열 한시 칠 분이었다. 하루종일 토나 티우의 말대로 움직였다는 생각이 그를 오싹하게 했다. "기다려보세요. 항상 이 시간 쯤에 걸려왔으니까.... 하지만 오늘 온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한준은 거실에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잡동사니를 긁어모아 수납장에 쑤셔넣었다. 돌아와보니 김 수사관이 전화기에 소형 스피커를 연결시키고 있었다. "음성 분석 결과가 나왔습니까?" 한준의 물음에 윤 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 기자, 다중 인격이란 말 들어봤겠지?" "예? ...다중 인격이라면... 한 사람이 두 가지 이상의 인격을 교대로 나타내는 특수한 정신상태를 지칭하는 말로 알고 있는 데요. 대부분, 주 인격인 제 1인격은 제 2 인격의 존재를 모르 고 있지만 알고 있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네. 그럼 제 2 인격이 나타날 때는 표정이나 음성이 딴 사람처럼 변하는 것도 알고 있나?" "혹시 토나티우가 누군가의 제 2인격이라는 말씀입니까?" "가능성은 충분해. 심증일 뿐이지만.... 현재 우리의 음성분 석 기술로는 인위적으로 변조한 목소리까지는 구분해낼 수가 없으니까 말이야. 발신지 추적이 되면 정확히 알게..."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황 계장이 빠르게 말했다. "통화 시간이 3분 이상 돼야 추적할 수 있어. 5분이면 충분 하고. 시계 봐." 한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수화기를 들었다. 메탈 베이스가 거실 가득 퍼져나갔다. "몸은 좀 어때, 쇼치필리?" 황 계장이 눈짓을 하자 김 수사관은 옆방으로 들어가 휴대 폰을 켜들었다. "아주 좋아. 덕분에 푹 잤잖아." "후후, 목소리 들어보니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은데 그래." "당신도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면서 하루 종일 혼수상태로 있어보라구." "그러지 않았으면 그 소리 때문에 네 뇌가 부서졌어. 인간 의 몸이 얼마나 약한 건지 넌 잘 모르겠지.... 이 음악을 들으 면 기분이 풀릴 거야." 잠시 조용하던 스피커에서는 열에 들뜬 여자의 신음과 남자 의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곧이어 여자의 비음 이 높아지고,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추측할 수 있는 질척한 마찰음이 섞여들었다. 한준은 황 계장 일행을 식은땀이 나도록 의식하며 벽만 보 고 있었다. 마치 고등학생이 나이든 선생님과 함께 포르노를 보고 있는 것처럼 거북하기 짝이 없었다. 벌써 십 분이 지나 고 있었으나 김 수사관은 여전히 가위 표시를 했다. 여자가 먼저 절규하고 남자의 탄성이 뒤따랐다. 지친 듯한 숨소리들 위에 메탈 베이스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실려왔다. 한준은 그가 조소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스피커에서 통화가 끝났음을 알리는 연속음이 울렸다. "어떻게 됐나?" 윤 검사의 물음에 김 수사관은 방에서 나오며 고개를 저었 다. "추적 못했답니다." "뭣? 12분이 지났는데도 못 알아내다니 일들을 어떻게 하는 거야!" 윤 검사는 휴대폰을 나꿔채 고함을 질러댔다. 저쪽에서 뭐 라고 설명을 하는 모양이었다. "어떤 놈이 그 따위 짓을 해? 대체 뭣들 하느라고 그 지경 이 되도록 몰라!" 윤 검사는 탁자 위에 휴대폰을 집어던졌다. 한준이 말했다. "전자 공학의 전문갑니다. 매우 뛰어난." "전화국에서 하는 소리도 그 말이라더군." "아까 그, 뇌가 부서졌을 거라는 건 무슨 얘긴가?" 황 계장이 물었다. 한준은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얘기해주 었다. "최면술이라고?" 윤 검사가 반문했다. "전자 분야의 전문가인데다 최면술사라..." 윤 검사와 황 계장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짐작가는 인물이 있습니까?" "...그만 가지요." 윤 검사는 한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황 계장에게 말하 며 일어섰다. 황 계장은 어두운 얼굴로 따라나갔다. "협조해줘서 고맙네. 그리고 자네... 몸조심하게." 황 계장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말했다. 제 6장 <백 민 호> 최 부장은 앞에 엉거주춤 서 있는 한준을 말 한 마디 없이 노려보기만 했다. 벌써 오 분째였다. 숨막히는 공기를 피해 하 나 둘 슬금슬금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뭣들 하는 겁니까? 일 안해요?" 갑자기 부장이 소리를 질렀다. 막 나가려던 사람들이 후다 닥 제자리에 가서 앉았다. 부장은 보고 있던 파일을 집어던지 고 신경질적으로 다음 것을 펴들었다. "너 왜 갑자기 반항하고 그래? 다 늙어서 사춘기냐? 혹시 최통하고 본격적으로 붙어볼 생각이라면 미리 얘기해줘. 오늘 아침 같은 분위기에서 365일을 견디느니 차라리 처자식 데리 고 굶어죽는 게 낫겠으니까." 구내식당에서 마주앉은 송 선배가 울상을 짓고 말했다. "어젠 일이 좀 있었어요." "있었겠지. 검찰청에서도 찾고 난리였던 걸 보면. 그래도 무 단 결근은 좀 심했잖아?" "집 전화번호 바꿨어요. 내일 새번호 나온다니까 가르쳐 드 릴께요." "곤란하니 말 돌리는 것 좀 보라지. ...근데 왜, 이사라도 갔 어?" "설명하자면 좀 복잡해요." "사람들한테 새번호 일일이 알려주기도 보통일 아니겠다. 하긴 뭐, 전화국에 신청하면 예전번호에서 안내해주니까..." "신청 안했어요." "하, 이거 정말 이상하네. 빚쟁이한테 볶이고 있는 거야?" "왜 다들 빚쟁이 때문일 거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네가 사람을 피할 이유가 그거 밖에 더 있겠냐구. 우리 보 이스카웃이 혼빙간을 했을 리도 없고." "했을 수도 있죠." "하늘이 뒤집어져도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서경덕 직계손이 여색을 탐하다니 말도 안되지. 황신혜가 와서 라이브쇼를 해 도 끄떡 안할 놈이니까, 넌." "우리 족보에 그런 할아버지 없어요." "뭘 사양하고 그래. 너 같은 성적性的 엄숙주의자가 아니면 누가 그댁 전통을 잇겠어." 성적 엄숙주의자라는 말에 한준은 충격을 받았다. 미처 깨 닫지 못했던 자신의 일면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게 됐을 때 느끼는 당혹감이 앞섰다. 아버지의 일이 있은 후부터 섹스라는 말에서 연상되는 것은 긴 날이 얼음처럼 선 칼이었다. 그 칼은 또한 시뻘겋게 발기 한 음경이기도 했다. 섹스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이고 아직 도 그를 집요하게 추적해오고 있었다. 양수리 토막 시체 유기 사건은 발생한 지 삼 주 가까이 지 나갔으나 여지껏 같은 자리만 맴돌고 있었다. 언론의 관심도 점차 식어가서, 최 부장 역시 양수리 사건을 이번호 특집으로 내보내려던 계획을 수정하고 대체할 다른 기사를 고르는 듯했 다. 전화번호를 바꾼 후로 토나티우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 수 사가 얼마나 진척됐는지 궁금했으나 갈 때마다 황 계장과 윤 검사는 자리에 없었다. 한준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위층에 사는 임 차장 부인 과 만났다. "총각 오늘은 일찍 왔네. 잘 됐어. 내 곧 갈테니 문 좀 열어 놔요." 그녀는 고모 회사 직원인 남편 때문에 한준에게 여러가지로 신경을 써주고 있었다. 고모에게 특별히 부탁을 받기도 한 모 양이지만 한준은 무척 부담스러웠다. "방금 끓인 거니까 먹어봐. 원, 그새 정말 많이도 말랐네. 얼굴을 볼 수가 있어야 뭘 먹이든 하지." 아직도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나고있는 뚝배기를 들고온 임 차장 부인이 한준을 훑어보며 혀를 찼다. 한준은 어색해하며 받아들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번번히 폐를 끼쳐서..." "좀 잘 먹고 다니우. 사장님께 내가 혼나." 한입 떠먹어 본 찌개는 맛이 괜찮았다. 쌀을 씻어 전기 밥 솥에 얹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홍재였다. "오늘 해가 동쪽으로 졌나? 니가 이런 한낮에 집에 있다니 놀라 자빠지겠다. 지금 너네 집 근처에 있는데 가면 밥 줄 수 있냐?" "하여간 먹을 복 하나는 타고났어. 찌개 있는 건 또 어떻게 알아가지고... 빨리 와. 막 밥하려던 참이니까." 한준은 그가 오기 전에 집을 좀 치워야겠다고 생각하며 서 둘러 샤워를 했다. 전화벨이 물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그는 수 건을 어깨에 걸치고 뛰어나왔다. 수화기를 들자마자 고모의 역정이 날아왔다. "한달만에 한 전화가 전화번호 바뀌었습니다, 달랑 한 마디 냐? 그것도 비서실에다 대고? 하기야 친자식도 소용없는 세상 에 조카놈이 다 뭐겠냐만." "에이, 왜 그러세요. 회의중이시라고 해서 그랬어요." "좋은 처녀 있으니 전화하란 지가 언제야, 이놈아. 선 좀 보 라니까." "선은 무슨 선이에요 쑥쓰럽게." "사귀는 아이가 있는 거냐?" "아뇨." "연애도 안하는 놈이 선도 보기 싫으면 그럼, 장가는 영영 안 갈 참이야?" "가고 싶을 때 갈께요.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쓰기 귀찮아 요. 그럴 시간 있으면 잠이나 더 자겠어요." 한준은 수건으로 다리의 물기를 닦으면서 심드렁하게 대꾸 했다. "귀찮아서 숨은 어떻게 쉬고 살아? 말도 아닌 소리 그만 두 고 어서 시간 잡자. 이번 주말은 어떠냐?" "이 달은 안돼요." "네놈이 되는 날이 어디 있어? 여러 말 하지 말고 이번 일 요일로 해." "이 달은 정말 안돼요. 다음 달 첫 주로 할께요." "그때 가서 또 딴소리 하려고?" "각서라도 쓸까요?" "퇴근해서 집에 왔는데 낯모를 처자가 앉아있다고 놀랄 것 없다. 내가 혼인신고해서 들여보낸 네 처니까." "제발 참아주세요. 선 본다니까요." "저녁은 먹었니?" "아직요. ...저, 윗층 아주머니가 찌개 갖다주셨는데 이젠 그 런 거 시키지 마세요. 저도 아주머니도 부담스럽다구요." "어서 먹기나 해. 그날 다른 약속 잡으면 안된다. 정말 들여 보낼 거야." 한준은 고모가 먼저 끊기를 기다렸다가 투덜거리며 귀에서 수화기를 떼었다. 그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 화가 끊겼는데도 발신음이 울리지 않고 있었다. 마치 저쪽에 서 누군가 계속 수화기를 들고 있는 것 같았다. "휴..." 나직한 한숨소리가 건너왔다. "꽤나 시끄러운 암탉이로군." 메탈 베이스가 말했다. 수건이 젖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준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선보러 나가면 안돼. 절대 그러지 마, 쇼치필리. 난 질투가 심하거든." "...어...어,어떻게..." "전화번호는 왜 바꾼 거야? 내가 너한테 무슨 해가 되는 짓 이라도 했던가? 나는 단지 너하고 얘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 야." 한준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 며 침착해지려고 노력했다. "내가 당신에게 뭔가 잘못한 일이 있었다면 사과하죠. 그러 니 부탁입니다. 이런 짓 그만 해요." "왜 그렇게 공손하지? 겁먹고 있는 것 같군, 응?" "경찰이 개입하면 복잡해집니다. 나도 그렇게까지는..." "쯧쯧, 말은 바로 하셔야지. 개입시켜봐도 별 수 없어서 그 만 둔 거잖아?" "......." "좋아, 용서해주겠어. 그나저나 엉덩이 정말 탐스럽군. 네가 울 때까지 깨물어주고 싶어." 반사적으로 창문쪽을 돌아보았으나 어두운 창 밖에는 가로 등 불빛만 비쳐들고 있었다. 한준은 공포에 질린 숨소리가 그 에게 들리지 않기를 빌었다. "그쪽이 아니야. 아무리 애써도 찾아내지 못할걸. 이런... 많 이 놀란 모양이군." 한준은 무의식중에 한손으로 성기를 가렸다. "내...내 집에 무슨 짓을 해놓은 거야?" "후후후... 나한테 반항한 벌이야." "미친 자식!" "내 생각도 그래. 그렇게 가리고 있지 말고 손 좀 치워." 한준은 몸을 웅크리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집을 옮기면 그만이야." "아니, 그러지 않는 게 좋아. 그런 짓을 하면 다시 그만큼의 벌을 받게 될 테니까 말이야." 그 순간 절박하게 떠오른 생각은 도망쳐야 한다는 것이었 다. 한준은 방으로 뛰어가 아무 옷이나 집히는 대로 걸쳐입었 다. "어? 너 어디 가냐?" 차를 주차시키고 막 운전석에서 나오는 참이던 홍재가 소리 쳤다. 한준은 차열쇠를 꺼내들다가 홍재를 보자 서둘러 그쪽 으로 달려갔다. "얼굴이 왜 그래? 귀신이라도 봤어?" 한준의 재촉에 차를 출발시키며 홍재가 어리둥절해서 물었 다. 한준은 땀으로 흠뻑 젖은 얼굴로 앞만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한준은 날이 밝는대로 기술자를 보내 집 점검을 시켰다. 이 틀간에 걸친 검색 결과는 아무 이상도 없다, 이러고도 찾아내 지 못하는 카메라가 있다면 아마 그 설치자는 하나님일 거라 는 것이었다. 기술자는 "가끔 선생님 같은 분이 있지요" 하고 여운이 긴 말을 덧붙였다. 집을 뜯어 엎기보다는 정신과에 가 서 상담하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될 겁니다, 라는 말이 생략됐 다는 것쯤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샅샅이 뜯어놓은 벽지와 타일을 원상태로 되돌리는 데 다시 이틀이 걸렸다. 한준이 마침내 집에 들어온 것은 나간 지 닷 새만인 토요일 밤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포 대신 차츰 끓 어오르기 시작한 분노가 용기를 주었다. 그는 거실에 들어서면서 희미하게 퍼져있는 기이한 향기를 맡았다. 새로 도배한 풀 냄새거니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감시 카메라는 없다고 했으나 계속 토나티우가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준은 거실창의 커텐을 쳤다. 토나티우는 그때 건너편 건물에서 천체 망원경 같은 것을 사 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침실에서 옷을 갈아입다가 갑자기 눈 앞이 핑 도는 것을 느 꼈다. 가까스로 벽에 기댔으나 곧 무릎이 꺾이면서 풀썩 쓰러 졌다. 온몸에 주체할 수 없는 열기가 뻗어나갔다. 성기가 고통 스러울 만큼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한준은 헐떡거리며 필사 의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누군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안녕, 쇼치필리." 메탈 베이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이럴 수가..." 그의 얼굴을 확인한 한준은 쉰 목소리로 신음했다. 믿을 수 가 없었다. 다중 인격일지도 모른다던 윤 검사의 말이 퍼뜩 스쳤다. 그러나 경악은 한층 더 강하게 몰아쳐오는 욕망의 바 다 속으로 잠겨버렸다. "옷 같은 건 그만 벗어버려. 뜨거울 텐데" 갑자기 셔츠가 달구어진 철판이 되어 가슴을 조여왔다. 한 준은 찢듯이 벗어던졌다. 토나티우는 그의 나신을 천천히 훑 어보았다. "자위해. 내게 보여줘." 한준은 벽에 기대어 앉아 다리를 넓게 벌리고 성기를 움켜 쥐었다. 혈관이 터져나갈 듯 부풀어오른 그것은 손이 델 만큼 뜨거웠다. 그는 입을 반쯤 벌리고 자위에 열중했다. 토나티우 가 보고 있다는 생각이 그를 더욱 흥분시켰다. "내가 안아주길 바래?" "......." "원하지 않는다면 그냥 가겠어. 넌 인내심이 강하니까 참을 수 있겠지. 물론 아침이 오기 전에 미쳐버리고 말겠지만." 한준은 피가 나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자기를 놔두고 가 버릴까봐 너무도 무서웠다. 한준의 머리는 오직 한가지 생각 으로 터져버릴 것 같았다. "원한다면 엎드린 채로 기어와서 내 페니스에 입을 맞춰라. 안아달라고 애걸해봐." 한준은 그의 말대로 했다. 자존심 따위는 어느새 흔적도 없 이 사라져 있었다. 제발 안아달라는 말이 거침없이 나왔다. 토나티우는 그를 침대에 눕히고 천천히 키스했다. 손길이 닿는 곳마다 괴로울 정도로 강렬한 쾌감이 불길이 되어 한준 을 태웠다. 한준은 자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쾌감에 떨며 비명 을 지르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끝없이 계속되는 힘찬 삽입 과 성기를 애무하는 혀의 느낌, 셀 수도 없는 오르가즘만이 존재했다. 새벽녘이었다. 하늘이 어두운 푸른색으로 바뀌어가고 있었 다. 한준을 등 뒤에서 안고 있던 토나티우가 귓불을 핥았다. "나에겐 너뿐이야 쇼치필리... 이대로 너하고 살고 싶어." 한준은 말없이 옆으로 누운 채 동이 터오는 하늘을 바라보 고 있었다. 토나티우의 정체는 이성을 되찾은 한준을 혼란 속 에 몰아넣었다. 한준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지. 머리가 맑아지자마자 내 존재가 고민스 러워진 모양이군. 영후 말이 맞아. 넌 빌어먹을 자식이야." 한준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 고개를 돌려 토나티우의 얼굴 을 다시 보았다. 토나티우가 일어나 앉아 손을 뻗어 한준의 눈을 감겼다. "내가 셋을 셈과 동시에 너는 깊은 잠에 빠진다. 깨어나서 는 내가 누군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좋아... 이제 네 몸은 지극히 평화로워졌다. 하나―둘―셋." 한준은 눈을 뜨고도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완전 히 의식을 회복한 것은 한참이 지나서였다. 그는 몸을 일으키 려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이불을 걷고 보니 시트 곳곳에 피가 배어있었다. 어젯밤의 격렬한 삽입이 떠올랐다. 모든 것 이 다 기억나는데 토나티우의 얼굴만이 망각 속에 묻혀 있었 다. 그는 분명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누군 지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녹초가 된 한준은 원로 정신과의인 H의대 양 교수를 생각했다. "여어... 이게 누구야. 서 기자, 그래 잘 지내고 있나?" "예. 교수님께서도 편안하시죠?" "나 같은 늙은이야 항상 그날이 그날이지. 헌데 웬일인가, 자네가 전화를 다 하고?" "다름이 아니라 좀 여쭤볼 게 있어서요. 저... 누군가 저한테 최면을 걸어놓은 것 같습니다. 어떻게 풀 수 있는 방법이 없 을까요?" "난 그 분야에는 깜깜일세. 최면 요법이라면 성일 병원 유 재웅이 첫손 꼽히지만 예약이 꽉 차 있어서 힘들 거야. 급한 일인가?" "예." "내 제자인 서울 병원의 김경혜도 쓸 만하네. 오늘은 안되 겠고.... 내일 시간내보라고 하겠네. 다섯 시에 외래 진료가 끝 나니까 그때 맞춰 가게." 한준은 네 시 반에 서울 병원의 정신과 카운터로 들어섰다. 접수하는 간호사에게 이름을 말하고 진료실과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준이 형 맞구나. 긴가민가 했는데." 누군가 반갑게 소리치며 한준의 어깨를 쳤다. 고개를 들어 보니 최나미가 활짝 웃고 있었다. "네가 여기 웬일이야?" "형도 참... 저번에 불면증 때문에 다닌다고 했잖아." "아, 맞아... 그랬지." "너무 했어.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 새내기 환영회에도 안 오고." "미안하다. 잊어버렸어." "흥... 믿어주지 뭐. 근데 회장님께서 여기는 무슨 일로?" "어? ...그게..." 최나미는 바로 앞에 있는 김경혜의 진료실을 쳐다보았다. "최면 요법 취재하러?" "...응." "검찰청 출입 기자가 별 걸 다 한다. 형네 잡지사 일손이 엄청 딸리는 모양이지? 그나저나 형도 성격 참 이상해. 바로 옆에 최고급 최면술사를 두고 여기까지 올 건 뭐람. 어쨌거나 정신과 전문의가 하는 게 더 권위있어 보여서?" "어떤 최면술사가 내 옆에 있는데?" "누구냐니? 민호 씨 말이야." "...뭐라고?" "어머, 몰랐어? 제일 친한 친구한테까지 말을 안했다구? ... 후후, 사실은 나도 민호 씨하고 미국에서 같은 학교 다녔던 사람한테 들은 거야. 그래도 난 민호 씨 애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걸 다른 사람 입으로 듣는 게 좀 비참했어. 형 도 몰랐다니 기분이 좀 낫네." "......." "미국에서는 수술도 많이 도와줬대. 마취제 없이 최면암시 로 무통無痛 수술을 유도하는 건데, 실력이 원체 뛰어나서 여 러 병원에서 초빙해 갔다더라구." 한준은 가늘게 몸을 떨고 있었다. 그는 잠시 후에 더듬거리 면서 물었다. "...민호가 기계도 잘 만져? 예를 들면 전화라든지..." "그럼, 당연하지. 민호 씨 전공이 뭔지 잊었어? 여건만 충족 시켜주면 우주선도 혼자서 만들어낼 수 있는 남자라구." "......." "그 사람, 재주도 많고 비밀도 많지. 성대 모사도 얼마나 잘 하는데. ...형은 나보다 더 모르는구나. 내가 애인이었던 게 맞 긴 맞는 모양이야." 최나미는 쓸쓸하게 웃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고 있다가 말을 계속했다. "언젠가 한 번은 술에 진탕 취해서 욕탕 가득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들어가 앉는 거야. 형, 취한 상태에서 뜨거운 샤워 하면 심장마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거 알지? 아무리 말려도 자기는 그래야 기분이 좋다면서 부득부득 안 듣더니 좀 있다 가 곯아떨어지더라구. 끌어다 침대에 눕히면서 보니까 등에 못 보던 문신이 있었어. 몸이 식으니 점점 희미해지다가 완전 히 사라져 버렸는데..." "...어,어떤 모양이었는지 기억해?" "글쎄.... 커다란 원판인데, 가운데는 스페이드 킹 같은 얼굴 이 혀를 쑥 내밀고 있고 그 주위로 굉장히 복잡한 그림들이 원으로 구획을 지어서 그려져 있었어." 의심할 여지 없이 그것은 '태양의 돌'이었다. 카바티나에서 들었던 정혜연의 말이 한준의 머리를 쳤다. 그리고, 외아들 클럽 회원들 등에는 <태양의 돌> 문신이 있다는 거예요. "안색이 창백하네요. 괜찮으세요?" 김경혜가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환 자용 소파에 앉았다. "퇴근하실 시간에 폐를 끼치게 돼서..." "아니에요. 교수님께서 부탁하신 일인데 당연히 도와드려야 죠. 들어보니, 후최면 암시더군요?" "후최면 암시요?" "최면 중의 특정한 암시가 각성 후에도 명료하게 남아있는 상태를 말하죠." 한준은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토요일 밤의 일을 얘기했 다. 김 박사의 미간에 약간 주름이 잡혔다. "단지 그 말 뿐이었어요?" "예." "그렇게 간단히 후최면 암시나 후최면 건망 같은 심최면 상 태를 진행시킬 수 있다니 믿기지가 않는군요. ...좋아요. 그 시 술자가 뛰어난 최면술사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제부터 중요한 건 서한준 씨가 나를 얼마나 믿느냐 하는 겁니다. ...눈을 감고 편안하게 누우세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쉬어요.... 지금 당신은 양쪽으로 방문들이 쭉 늘어서 있는 복도에 있습 니다." 한 시간 후에 김 박사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천천히 복도를 걸어나와요. ...이제 당신은 평상시로 돌아왔 습니다. 눈을 뜨세요." 한준은 누운 채 천장을 보고 있다가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쳤 다. 김 박사도 잠자코 볼펜 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고 있 었다. "...당신은 토나티우를 악몽 같은 과거의 총합으로 인식하고 있어요. 그것이 그의 단 한 마디에도 최면이 걸리는 이윱니다. 내가 맡을 수도 있겠지만 기간이 얼마나 걸릴 지, 또 그 기간 후에라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지 장담할 수가 없군요." "그럼 어떻게 해야..." "성일 병원의 유재웅 박사에게 의뢰서를 써드리지요. 최대 한 빠른 시일 안에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부탁해보겠습니 다." 한준이 백민호가 묵고 있는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이 훨씬 지나 있었다. 그 시간에 연락도 없이 찾아온 한준을 보 고도 백민호는 별로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한준에게 맥주 한 캔을 던져주고 자기도 한 캔 따 마시면서 침대머리에 기대 앉아 지금까지 읽고 있었던 듯한 책을 다시 펴들었다. 한준은 평소와 다름없는 그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백민 호의 수려한 얼굴은 가을호수처럼 담담하고 차가웠다. 침대 맡의 스탠드 불빛만이 비추고 있는 어두운 방안의 적막을 깨 는 것은 백민호가 넘기는 책장 소리뿐이었다. "꽃의 전쟁을 하고 있는 게 너희야?" 먼저 입을 연 쪽은 한준이었다. "그, 대단한 외아들 클럽이냐구?" 백민호는 천천히 책에서 얼굴을 들었다. 한준을 응시하는 표정은 여전히 무감동했다. 한준은 힘껏 주먹을 쥐었다. "좋아, 대답하기 싫다면 하지 마. 어차피 이젠 네가 하는 말 따위는 믿지 못할 것 같으니까." "......." 백민호는 한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맥주를 한 모금 마 셨다. 땀으로 젖어있는 한준의 얼굴은 스탠드 빛에 비쳐서 창 백하게 빛나고 있었다. "...넌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했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너를 속이거나 기만하지 않았 어. ...너를 좋아했기 때문이야. 나는 지금도 널 믿고 싶어...." "감격스러운 얘기로군. 서한준이 나를 좋아했다니. 엎드려서 눈물이라도 흘려야 하나?" 백민호는 그에게 맥주캔을 들어 건배하는 몸짓을 해보였다. "그 보답으로 내가 섹스할 때 어떤 상상을 하면서 절정을 느끼는지 말해줄께. 네 몸을 조금씩 오랜 시간 잘라나가는 거 야. 마침내 넌 머리만 남은 채로 비명을 지르고 울면서 나의 자비를 빌게 되지. 철저하게 무력하고 가엾은 얼굴로 말이야." "...농담은... 그만둬..." "농담은 네가 하고 있지, 안 그래? 날 친구로 생각했다는 둥, 좋아했다는 둥 해가면서 말이야. 헛소리하지 마. 네가 친 구로 받아들이는 건 예나 지금이나 홍재 뿐이야. 고등학교 때 넌 언제나 구원자로 나타났지. 얼간이들한테 당하고 있을 때 면 어디선가 항상 네가 친절한 얼굴로 다가와서 손을 내밀어 줬어. 그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이었는지 넌 죽었다 깨나도 모 르겠지. 아니면 알면서 일부러 그랬던 건가? ...그때 내가 치를 떨며 증오했던 건 그 얼간이들이 아니라 천사 같은 얼굴 뒤에 더러운 위선을 감추고 있던 개새끼, 바로 너였어." 백민호의 어조는 침착했다. 한준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떨고 있었다. 짙은 음영이 드리워진 백민호의 얼굴은 마 치 얼음장 같았다. 집에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한준은 옷도 벗 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숨을 쉴 때마다 텅 비어버 린 머리가 터질 듯 지끈거렸다. 백민호와 나눴던 수많은 추억 이 조각조각 찢겨나가면서 흐른 피가 가슴에 묵지근하게 고여 있었다. 내 뒤의 사냥꾼들은 무시무시한 침묵 속에서 끈질기게 추격 해왔다. 멀리서 어머니가 피 흐르는 얼굴로 나에게 손을 내밀 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품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하여 달려 갔다. 내 앞을 가로막으며 아버지가 나타났다. 아버지는 고함을 지르면서 나를 닥치는 대로 두들겨팼다. 나는 금세 피투성이 가 되었다. 피에 젖어 끈적거리는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필사 적으로 바닥을 기어 달아났으나 아버지는 계속 나를 짓밟았 다. (저런 인간은 어디 가서 콱 죽어버리라고 해. 저 사람이 아버지라고? 개새끼, 제발 죽어버려라.) 어느새 내 옆에는 검은 옷의 사내가 서있었다. 새까만 입술 을 벌려 웃으며 자신의 심장에서 얼음칼을 빼들었다. 다음 순 간 사내의 긴 머리가 공중에 넓게 펼쳐지고 가닥가닥이 검은 불길로 타올랐다. 아버지는 참혹한 비명을 지르면서 담벽에 내동댕이쳐졌다. 얼음칼이 아버지의 눈을 꿰뚫었다. 아버지는 마치 표본용 나비처럼 벽에 매달려 있었다. 사냥꾼들은 벌써 바로 뒤에까지 와있었다. 검은 옷의 사내 가 활을 들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리리 띠리리리.... 나는 사 냥꾼들을 가리켰다. 검은 옷의 사내는 화살을 메겨 그들을 겨 누었다. 화살은 똑바로 날아가 어머니의 가슴에 꽂혔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띠리리리. 한준은 번쩍 눈을 떴다. 심장이 목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격렬하게 뛰었다. 그를 깨운 단조로운 음향이 계속되고 있었 다. 몇 초 후에야 그것이 전화벨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수 화기를 들어올리는 데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왜 그래, 쇼치필리. 나쁜 꿈을 꾸었나?" 한준은 수화기를 두 손으로 힘껏 움켜쥐었다. 분명히 토나 티우는 감시 카메라나 혹은 다른 어떤 것으로 한준을 보고 있 었다. "괜찮아, 진정해... 쉬... 꿈일 뿐이야. 이젠 끝났어. 그것들은 꿈 속에 있어. 이 세상으로는 나오지 못해....여기는 안전해." 그의 음성은 더할 수 없이 부드러웠다. 한준은 눈물을 흘렸 다. 십 칠 년간 그 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말이었다. "...당...신도... 악몽을 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꾸지. 달빛이 밝을 때면." "...어떤 꿈이야?" "그만 자도록 해. 다시 깰 때까지는 그 꿈이 널 괴롭히지 않을 거야. 내가 약속하지." 창작연재 (serial) [헌팅시즌] 제 3편 <꽃의 전쟁> -07- 등록자: realkj(김금주) 등록일: 07-11 조회수: 1438 제 7장 <흑 표 범> 아침 회의를 마치고 열어본 책상서랍 속에 흰 봉투가 한 장 들어있었다. 안의 쪽지에는 <오늘밤. 부산항 제 3부두. 강영후 소유의 크루저 테크파틀 호. 외아들 클럽>이라고 쓰여 있었 다. 한준은 그 한 줄을 되풀이해서 읽고 또 읽었다. "선배님, 저 부산 좀 다녀와야겠어요." "부산?" 송 선배는 슬쩍 편집실을 돌아보더니 소리죽여 물었다. "최통이 너 보기싫다고 부산지부로 쫓아냈냐?" "그런 게 아니구요. 얘기해봤자 허락받지도 못할 거라서..." "뭐야? 그럼 최통한테 말도 안하고 간다는 거야?" "선배님이 잘 좀 둘러대주세요. 언제 올 지도 모르겠으니까" "아이고, 너 정말 왜 그러냐. 저번에 무단결근했던 걸로도 부족해서 그래? 올 것 없어. 그냥 거기서 살아." "갈께요. 부탁합니다." "야 임마, 가긴 어딜 가! 돌아오지 못해? ...어휴, 이러다 명 대로 못 살지, 내가." 늦은 오후의 부산항은 발디딜 틈도 없이 번잡했다. 한준은 멀찍이 물러서서 테크파틀 호를 살펴보고 있었다. 호화로운 외장을 갖춘 3천 t급의 대형 요트였다. 나와틀어 사전에 테크 파틀은 '흑요석 칼'로 풀이되어 있었다. 다섯 시가 조금 지나자 트럭 몇 대가 와서 배 가까이에 멈 췄다. 식료품인 듯한 꾸러미 더미가 내려졌다. 한준은 기회를 봐서 인부들의 대열에 끼어들었다. 요트 안의 식료품 창고로 두어 번 왕복하다가 물건이 쌓여있는 한켠으로 몸을 숨겼다. 얼마 안있어 창고 문이 닫히고 주위가 조용해졌다. 한준은 부 두쪽으로 나있는 선창 앞에 자리를 잡았다. 밤이 깊어지자 화려하게 차려입은 남녀들이 하나둘씩 도착 했다. 저명인사도 여럿 끼어있었다. 한준은 승선객의 체크에 정신이 팔려 창고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한순간에 경비대인 듯한 사내들이 한준을 둘러쌌다. 그는 당황하여 주춤거리다가 잽싸게 빈 곳을 뚫고 창고 밖으로 달 아났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푹신한 카펫이 깔린 복도였다. 양 옆으로 선실문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으나 모두 잠긴 채였다. 한준은 이 문 저 문의 손잡이를 정신없이 돌려보다 마침내 열 려있는 곳을 발견했다. 넓은 방 가운데 한 남자가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우당탕 요란하게 뛰어든 한준을 보고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 다. "흑표님, 괜찮으십니까?" 한준을 쫓아온 경비대 중 한 명이 밖에서 물었다. 남자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얼음이 든 술잔을 몇 번 흔들더니 무심하 게 대답했다. "내 손님이야. 신경쓰지 마라." "예, 알겠습니다." 경비대는 즉각 물러갔다. 한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는 턱짓으로 자기 앞의 안락의자를 가리켰다. 의자에 앉 다가 그를 본 한준은 흠칫했다. 삼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는 마치 일류 조각가가 심혈을 기울여 깎은 걸작품 같았다. 단추 가 몇 개 풀려있는 셔츠 사이로 매끈한 구릿빛의 피부가 들여 다보였다. 양쪽의 가슴 근육이 나뉘어지는 부분에 희미한 칼 자국이 비스듬히 나 있었다. 그는 강영후 만큼이나 아름다웠 다. 한준은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다가 열린 침실문 사이로 침대 에 누워 있는 누군가를 보았다. "죄송합니다. 좋은 시간을 방해했군요." "...그렇군." 흑표는 미소를 지으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한준은 그토록 외로운 미소를 본 적이 없었다. "한잔 할 텐가?" "예." 흑표는 장식장으로 걸어가 잔을 하나 꺼냈다. 그 우아하고 긴장감있는 몸놀림에서 한준은 그의 별호가 어째서 흑표인지 알 수 있었다. "저는 월간 N지 기잡니다. 외아들 클럽을 취재하러 왔어요. 뭐라도 알고 계시는 것이 있으면..." "그 명칭 별로 좋아하지 않더군." 흑표의 낮은 허스키는 거칠면서도 묘하게 감미로웠다. 한준 은 언뜻 토나티우를 생각했다.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그들은 대규모 범죄를 주관하고 있 는 듯합니다. 제가 궁금한 건..." "꽃의 전쟁이겠지. 잊어버려.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어. 특히 너는 안돼, 쇼치필리." 한준이 들고 있던 술잔이 떨어졌다. 잔은 깨지지 않았으나 쏟아진 술이 흰 융단에 얼룩을 남겼다. "...토...나티우를 아십니까?" "그는 토나티우가 아니야. 네가 알고 있는 그는 테스카틀리 포카야. 토나티우는 네 심장을 쥐고 싶어하지만 테스카틀리포 카는 네 마음에 관심이 있지. ...하지만 그놈, 후회할 짓을 하 고 있어. 내가 했던 것처럼...." "후회하다니, 무엇을요?" 흑표는 술잔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준은 그의 윤곽이 뚜렷 한 입술에 희미하게 경련이 스쳐가는 것을 보았다. 흑표는 비 어있는 잔에 술을 따랐다. "명문가 도련님처럼 고상한 녀석이 하나 있었지. 건방진 놈 이라서 버릇을 좀 가르쳐주려고 했어. ...그때 난 내가 그에게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뭔지 모르고 있었어. 다만 그가 사랑하 는 것들을 모두 없애버리고나면 그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 각했지. 그런데... 완전히 내 것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순간 에..." 흑표는 천천히 손가락으로 가슴의 흉터를 쓸었다. 허공을 향한 그의 눈동자는 무엇인가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난 시체를 좋아해. 쓸데없이 거만을 떨거나 시끄럽게 굴지 않으니까.... 하지만 살아있는 게 더 나은 녀석도 있더군. 유럽 에서 제일 가는 박제사의 솜씨라서 모습은 8년 전 그대로지만 더 이상은 나를 노려보지도 미워하지도 않지. 아무리 즐거운 이야기를 해도 웃어주지 않아." 한준은 얼굴이 창백해져서 침대 위의 인물을 주시했다. 아 까 보았던 자세 그대로였다. 가슴께까지 덮여있는 이불은 전 혀 움직임이 없었다. 흑표는 눈을 감은 채 묵묵히 앉아 있다 가 한준에게 말했다. "외아들 클럽은 여기 없어. 얼마 후에 큰 제사가 있어서 참 석 못했지." "...제사라구요?" "이 배는 사십 분 후에 출발해서 6주간 태평양을 순항할 거 야. 같이 가겠나?" 흑표의 권유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어떤 세계로의 초대처럼 들렸다. 한준은 그리움 같기도 하고 충동 같기도 한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 세계에는 슬픔도, 절망도, 두려움도 없 을 것이다. 그리고 악몽 역시.... 안돼. 내려야 한다는 것 잘 알잖아.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흑표는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해놓고 도 한준은 선뜻 일어서지지가 않았다. 그들은 잠시 그대로 앉 아 있었다. 흑표가 먼저 술잔을 들고 일어나서 침실로 걸어갔 다. 한준은 그가 침대 위의 사람에게 키스하는 것을 보고 있 었다. 그에게 인사를 하려다가 그만두고 한준은 선실을 나섰 다. 선실 문을 닫는 한준의 귀에 허스키의 부드러운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래, 손님이 왔었어.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당신은 이제 어디로도 갈 수 없으니까...." "부장님, 저 어제..." 아침 회의 끝나고 머뭇거리며 말을 붙이는 한준에게 최 부 장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나갔다. 송 선배가 달려왔다. "살다보니 별 일이 다 있어, 안 그러냐? 어제 내가 눈치보 면서 네 얘기 했는데 알았다고 하고는 그만이야. 너 그새 최 통댁 여사님한테 뭐 좀 바쳤어?" "그런 주변머리나 있으면 구박받고 살겠어요? 이유없이 저 러니까 더 불안한데요." "그나저나 어제는 무슨 일이었던 거야? 나도 좀 알자. 그만 큼 간 졸아붙게 했으면 뭔가 좀 있어야 할 것 아냐." "선배님, 기자생활 한 지 얼마나 되셨죠?" "응? 그러니까... 십 일년째구나. 햐, 세월 빠르기도 하다." "혹시 흑표라는 이름 들어봤습니까?" 송 선배는 뜻밖의 얘기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흑표는 왜?" "아세요?" "알지 그럼. 그 시절 사회부 기자 치고 흑표 모르면 간첩이 지. 아무튼 주먹도 주먹이지만 두뇌회전이 그렇게 비상한 놈 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으니까. 8년 전에 암흑가를 통일했다 는 소문이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곧바로 출국해버렸어. 유럽 으로 갔다는 말도 있고 일본에서 봤다는 얘기도 있는데 확실 히는 모르겠고, 어쨌든 그 후로 귀국하지 않은 것 같더라구." "...8년 전에 유럽으로요." 검찰청으로 가는 길 내내 흑표의 외로워 보이던 얼굴과 침 대 위의 누군가가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오싹한 한기를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 생각하게 하는 알 수 없는 무엇 이 가슴 속에 남아있었다. 네티즌광장 서비스 바로가기 ------------------- 메일 검색 메신저 iman 게임 ------------------- 커뮤니티 네티즌광장 동호회/작은모임 시티조인 ON & OFF 채팅 ------------------- 컨텐츠 만화/무협 게임 방송/영화 음악 성인 교육/키즈 여성/생활 증권/경제 ------------------- 쇼핑 공동구매 ------------------- 인터넷비즈니스 고객센터 회사소개 하이텔홈 > 커뮤니티> 네티즌광장> 창작연재 창작연재 (serial) [헌팅시즌] 제 3편 <꽃의 전쟁> -08- 등록자: realkj(김금주) 등록일: 07-11 조회수: 1464 제 8장 <다가오는 그림자?Ⅱ> "서 형, 어제는 무슨 일이야. 내근 걸렸나?" 월간 K의 권 기자가 한준을 보자마자 물었다. "어제 사고 난 거 모르지? 윤성렬 부장 검사 지금 중환자실 에 있어." "뭐야? 어쩌다가?" "바로 이 앞 도로에서 뺑소니 차에 치었다는군. 이상한 건 목격자가 그렇게 많았는데도 무슨 차인지, 차번호가 뭔지 아 무도 기억 못한다는 거야." 한준은 수사과로 찾아갔다. 황 계장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면식이 있는 수사관에게 물으니 어제부터 결근이라고 했다. 김환 수사관은 어디 있느냐고 하자 그는 말없이 몇 줄 떨어져 있는 자리를 가리켰다. 말끔이 치워진 책상 위에 국화 한 다 발이 놓여 있었다. "오늘 새벽에 발인했어요. 그 건강하던 친구가 하룻밤 새 심장마비라니 말이 됩니까. 어제는 또 윤 영감님이 그렇게 되 고, 푸닥거리라도 해야 할지 원...." 그 날 오후에 김 박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유재웅과 예약을 잡아놓았으니 모레 여섯 시까지 성일 병원으로 가라는 전갈이 었다. 외래 진료가 끝난 시간이라 병원 안은 한산했다. 한준은 불 이 꺼진 접수창구를 지나 3층으로 올라갔다. 유재웅의 진료실 과 딸린 대기실 카운터의 간호사에게 이름을 대니, "들어가서 기다리세요. 과장님께서는 병동에 일이 있어서 가셨는데 곧 오실 겁니다." 하며 진료실 문을 열어주었다. 뭘 좀 마시겠느 냐는 말에 괜찮다고 하자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부산에서 올라온 새벽에, 복사해놓았던 아즈테카의 신화를 뒤져서 테스카틀리포카를 찾았다. 그는 아즈텍 족의 부족신인 위치로포치틀리, 비의 신 틀라로크, 깃털의 사신蛇神 케찰코아 틀과 함께 아즈테카 4대 주신主神 중 하나로 꼽히는 존재였 다. ≪......우주의 최고신이자 만물의 근원인 오메테오틀은 스스 로 만물의 창조를 행하지 않고 자신의 분신이며 자식인 테스 카틀리포카와 케찰코아틀에게 실제의 일을 맡겼다. 천지창조 를 행했던 오메테오틀의 분신은 붉은 테스카틀리포카, 파란 테스카틀리포카, 검은 테스카틀리포카, 그리고 케찰코아틀이었 다. 이때 테스카틀리포카는 차는 달의, 케찰코아틀은 이지러지 는 달의 신격화로 보고 있다. 西는 태양이 사는 나라로서 붉은색으로 표현한다. 南은 태양의 진로 왼쪽에 해당하며 가시나무가 있는 땅으로서 파란 색으로 표현한다. 北은 죽음과 어둠의 나라로서 검은색의 영 역이다. 東은 태양이 떠오르는 빛과 풍요의 방향으로서 흰색 으로 나타낸다. 붉은 테스카틀리포카(西)는 농경과 풍작의 신 시페 토테 크였고, 수렵의 수호신이었으며, 은하(銀河)인 미스코아틀이기 도 했다. 파란 테스카틀리포카(南)는 위치로포치틀리였다. 검 은 테스카틀리포카(北)는 본래의 그 자신이었다. 그리고 흰색 (東)의 화신(化身)에 있어서는 케찰코아틀과 동일했다. 이와 같이 테스카틀리포카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양하게 변신하 는 인격 분열적 모습으로 등장한다. 밤에 방랑하는 신 테스카 틀리포카는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지만 어 느 곳에나 존재하며, 가슴에 단 거울을 통해 사람들의 모든 행위와 생각을 알았다.≫ 서 기자, 다중 인격이란 말 들어봤겠지? 한준은 일어서서 진료실을 서성거렸다. 백민호의 차가운 얼 굴을 생각했다. 따져보면 그가 토나티우...아니, 테스카틀리포 카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러가지 정황으 로 미루어봐서 혹시 모종의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심증일 뿐이었다. 외아들 클럽의 회장이라는 유재웅에게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해야 할지, 또 그가 테스카틀리포카의 최면을 풀 수 있을지 한준은 초조해졌다. 윤 검사는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 다. 황 계장은 벌써 나흘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동료 들은 물론 가족도 그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테스카틀 리포카가 누군지 기억해내야만 이 모든 일의 실마리가 잡힐 것 같았다. 유재웅이 들어왔다. 가까이서 본 그는 하가 호텔 리셉션 홀 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동물적인 느낌이었고, 숨이 막힐 정도 로 차가운 눈매를 하고 있었다. 한준의 인사에 가볍게 목례를 하면서도 그 얼음 같은 눈길을 한준에게서 떼지 않았다. 김 박사의 의뢰서를 건네주자 펴보지도 않고 내려놓았다. "김 선생님에게 어느 정도 말씀은 들으셨겠지만 누군가 저 에게 최면을 걸어놓았습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 반드시 기억 해내야 해요. 도와주십시오." 유재웅은 미소를 지으며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의자에 앉 아있는 한준의 두 다리 사이의 공간에 한쪽 발을 올려놓더니 한준의 눈을 친근하게 들여다보았다. "그래, 부산에서는 재미있었소?" 메탈 베이스가 말했다. 한준은 온몸이 마비된 듯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핏기가 가신 얼굴에서 움직이는 것은 떨리는 입술뿐이었다. "원래 계획은 윤 검사와 함께 당신도 갈아버리는 거였소.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 회원 중 누군가가 당신을 부산으로 빼돌렸지. 누군지 밝혀지는 대로 합당한 처분을 받게 되겠지 만" 한준은 일어나려 했으나 유재웅이 단단히 의자를 밟고 있었 다. 그는 손을 뻗어 흘러내린 한준의 앞머리를 뒤로 넘겨주었 다. "어쨌든,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이니 충고 하나 해드 릴까. 난 기자는 딱 질색이오. 그런 더러운 인종은 하나라도 더 죽여 없애야 대기오염이 줄어들 거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당신이 더 이상 우리 일에 머리를 들이밀지 않는다면 굳이 제 2의 계획에 포함시키지는 않겠소. 회원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 는 건 곤란하니까.... 알아들었기를 바래요." 유재웅은 의자를 거칠게 밀어냈다. 한준은 간신히 넘어지지 는 않았다. 유재웅은 뒷걸음질치는 한준을 파랗게 빛나는 눈 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먹이를 노리고 있는 맹수 같았다. 운전을 하고 있는 건 한준이 아니라 한준의 반사신경이었 다. 머리 속에는 유재웅의 메탈 베이스가 어지럽게 울리고 있 었다. 돌연한 부산행에 대해 별 소리 없었던 부장을 생각했다. 그것도 책상 속에 쪽지를 넣어둔 누군가의 입김이었을까? 그 리고, 흑표의 방문만이 열려있었던 것은 설마... 한준은 넋을 놓고 있다가 룸미러에 뭔가 희끗한 것이 비치자 기겁을 했다. "놀라지 말게. 날세." 황 계장이 뒷좌석에서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한준은 너무 놀란 나머지 할 말을 잃은 채 그가 운전석 옆자리로 넘어오는 것을 멍청히 보고 있었다. "...계...계장님... 도대체..." "시간이 없으니 간단히 설명하지. 놈들이 김 수사관과 날 죽인 후에 영감님을 처치하려 했네. 나만 간신히 수사 파일을 챙겨서 도망쳤어. 대담하게도 검찰청 바로 앞에서 영감님을 습격하고는 한순간에 목격자들에게 집단 최면을 걸어 사건 현 장을 기억하지 못하게 했네. ...사방이 적이야. 마누라조차도 믿을 수가 없어. ...이걸 좀 맡아주겠나?" 황 계장은 점퍼 속주머니에서 반으로 접힌 서류봉투를 꺼냈 다. "C은행 본사의 개인 금고 파-45번에 <꽃의 전쟁> 수사 기 록 일체가 들어있네. 이건 그 열쇠와 비밀번호, 위임장일세. 자네는 절대로 열어선 안돼, 알겠나? 자네의 행동은 토나티우 가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 있어. 자네가 가장 신뢰하는 기자에 게 넘겨줘. ...그리고, 이 번호로 연락해서 한시 빨리 거처를 옮기라고 전해주게. 전화를 받으면 먼저 '나룻배'라고 암호를 대고 자네 이름을 말하면 그쪽에서 믿을 거야." "그 사람은 누굽니까?" "하가 호텔 사장 심윤석일세. 얼마 전까지는 하가 그룹의 재무이사였던 사람이지. 심 사장의 협조가 아니었으면 수사가 이만큼 진전되지 못했네. 그 바람에 놈들에게 제 1의 표적이 되고 있어." 황 계장은 약지에 끼고 있는 결혼반지를 계속 돌려대고 있 었다. 루비가 실내등을 받아 사방에 붉은 광채를 뿌렸다. "저, 지금 유재웅을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어떻게 된 일인 지 알 수가 없어요. 목소리가... 그 전화와 똑같습니다." "확신하지 말게. 토나티우는 배우의 소질이 다분한 것 같으 니까" "예?" "저기 골목에서 내려주겠나?" 한준은 주머니를 뒤져서 가진 돈을 모두 털었다. "죄송합니다. 얼마 안됩니다." "나야말로 미안하네. 자넬 이런 일에 끌어들여서..." "약속했잖습니까.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도 와드리겠다구요." 황 계장은 그의 어깨를 한 번 힘주어 잡더니 어두운 골목으 로 사라졌다. 한준의 전화를 받은 심윤석은, "월간 N의 서한준 씨라면 혹 시... <푸른 수염>을 쓴 기자 아니오?" 한준이 와주기를 부탁 했다. 그가 있는 곳은 광명시의 허름한 여관이었다. "서한준 씨요?" "그렇습니다." "신분증 좀 보여주시오." 한준은 문 틈으로 기자증을 밀어넣었다. 뭔가 육중한 것을 치우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리고 초췌한 오십대 사내 의 얼굴이 나타났다. 한준이 들어가자 심윤석은 서둘러 문을 단속하고는 큼직한 여행가방을 끙끙거리며 문 앞에 대놓았다. "...처음엔 그저 장난이라고 생각했소. 젊은이들이니까 예쁜 여자 끌어다가 놀고 싶어하는 것이려니 했지요. 하지만 사람 들을 죽이는 것을 보고 내가 큰 잘못을 했다는 것을 알았소. 달마다 있는 제사에는 다섯 명씩, 여섯 달에 한 번 돌아오는 큰 제사에는 삼십 명씩을 죽이는 거요. 양수리 사건도 그들 짓이오. ...아니, 그들이라기보다는 그중 한 사람이지만" "누가 말입니까?"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 클럽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회원이 하나 있어요. 그 회원이 외아들 클럽과 성향에 대한 이야기를 일부러 흘려서 강 실장이 다니던 대학에 소문이 자자했었소. 하지만 별 타격을 입지는 않았지요. 회원들 중 그 학교 출신 들은 모두 유학가 버려서 곧 잠잠해지고 말았으니까... 그들은 모두 여섯 명인데 왠지 일곱 명으로 소문이 나 있소. 이상한 건 나도 가끔씩 그런 착각이 든다는 거요." 한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두 사람인 누군가가 섞여있기 때문 이라고 한준은 생각했다. "희생자는 어떻게 유인합니까?" "돈과 최면술을 쓰지요." "백민호와 유재웅 둘이서 말입니까?" "아니오. 강 실장도 하죠." 한준은 입을 벌린 채 심윤석을 응시했다. "...강영후가... 최면술을 한다구요?" "강 실장은 천재요. 배우려고만 들면 뭐든 완벽하게 흡수해 버리죠. 경영학 박사지만 유학 시절에는 뛰어난 연극배우였고, 동서양의 정통 제약학과 비전하는 제약술, 그리고 전자 공학 에도 조예가 깊소." "...연극... 제약술과, 전자 공학에..." 한준은 천천히 되뇌였다. "당신네 잡지사에 전화하고 사진을 보냈던 남유미는 가짜 요. 첨단과학이 시체를 되살려낸 거요. 그 여자는 실종된 지 사흘만에 별장에서 산 제물로 바쳐졌소." "그럴 수가..." 한준은 한참만에야 정신을 수습했다. "...그 별장은 어디에 있습니까?" "주왕산에 있소." "경북 청송의 그 주왕산 말입니까?" "그래요." "설마... 몇 달 전에도 다녀왔는데..." "당신이 바로 그 앞을 지나쳤다 해도 전혀 눈치챌 수 없었 을 거요. 겉으로 보기엔 멋진 별장일 뿐이니까." "하가 그룹에서 그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나뿐이오. 강 실장에게 약점을 잡혀서 협조할 수밖에 없었 소. 나는 자금담당이었는데 회원들이 점차 각자의 분야에서 실권과 함께 자금동원력을 쥐게 되니 쓸모가 없어져 처리하려 하는 거요. 하가 호텔을 맡겨서 안심시켜놓고 말이오.... 2주 전에 우리 가족이 묵었던 콘도에 이유모를 화재가 나서 아내 와 딸아이 셋이 죽었소. 거기서 내 시체를 찾지 못하자 자객 을 시켜서 날 쫓고 있소. 그래서 윤 검사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는데 이렇게 되고 말았어요. 난 이제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모르겠소. ...믿을 사람은 당신뿐이오. 강 실장을 상대로 그 런 기사를 쓸만큼 용기있는 사람이잖소. 부탁이오. 날 좀 살려 주시오" 한준은 온 집안에 불을 켜놓고 거실에 앉아 있었다. 좋아하 는 음악도 틀지 않은 채 맞은편 벽을 골똘히 응시하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유재웅의 목소리가 그 전화와 똑같습니다. 확신하지 말게. 토나티우는 배우의 소질이 다분한 것 같으 니까. 강 실장은 유학 시절에 뛰어난 연극배우였소. 민호 씨, 재주도 많고 비밀도 많지. 성대 모사도 얼마나 잘 하는데. 한준은 전화벨이 열 번 가량 울렸을 때 천천히 손을 뻗어 수화기를 들었다. "그 일에서 손떼, 쇼치필리." 한준은 한 차례 심호흡을 했다. "무슨 일 말이야?" "내 말 들어. 날 화나게 하지 마." 평소의 다정하고 여유로운 말투가 아니었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군. 아까 확실히 보기는 했지만." "난 유재웅이 아니야." "당신이 누구든 상관없어. 어떤 얼굴을 하고 있건간에 추악 한 살인마임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너희는 모두 교수형에 처 해질 거야. 내가 반드시 그렇게 하고야 말겠어." 테스카틀리포카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한준은 어디선가 지켜 보고 있을 그의 눈을 의식하면서, 떨고 있는 것을 눈치채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케찰코아틀만은 되지 마. 널 해치고 싶지 않아." 그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배어 있었다. 한준은 내심 놀라 면서도 침착하게 말했다. "당신은 당신 일을 해. 난 내 일을 할 테니까." "...보여줄께, 쇼치필리. 내 꿈을... 나를 보라구." ≪수많은 신화에 어둠의 신 테스카틀리포카가 깃털의 사신 蛇神 케찰코아틀을 툴라에서 쫓아낸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변신에 능한 테스카틀리포카는 검은 마술로 케찰코아틀을 꾀 어 술에 취한 채 육욕의 죄를 짓게 했다. 수많은 톨테카인이 죽었으며, 이로써 톨테카의 황금시대는 끝이 났다. 자신의 본거지에서 밀려나기는 했지만 농경신?문화신으 로서의 케찰코아틀의 존재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즈 테카인들은 깃털의 사신蛇神도 어둠의 신과 똑같이 신앙하여, 산 제물에 대한 부정과 적극적인 긍정의 양 극단을 병존시켜 나갔다.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인간의 희생은 절대적으로 필요 했다. 그러나 산 제물을 거부하는 결백한 神 케찰코아틀이 언 제 다시 돌아와 테스카틀리포카에게 대항할지 알 수 없는 일 이었다. 만약 케찰코아틀이 승리하게 되면 세계의 안전은 보 장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불안은 스페인 정복군의 일을 한 층 쉽게 만들어주었다. 아즈테카인은 산 제물의 중지를 요구 하는 그들을 케찰코아틀이 돌아온 것이라 생각하여 저항할 의 지를 잃고 말았고, 아즈테카 제 5의 태양은 그렇게 몰락의 길 로 접어들게 되었다.≫ 숨이 막힐 듯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들판 가득 피어난 유채 꽃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고, 그 가운데 젊고 아름다운 여인 이 앉아 있었다. 소년은 화사하게 웃는 여인에게 다가가 등 뒤에 감추고 있던 칼을 휘둘렀다. 깊게 잘린 목덜미에서 피가 솟구쳐 샛노란 꽃잎 위로 후두둑 흩뿌려졌다. 순식간에 온 들 판이 피로 붉게 물들었다. 핏물을 흘리는 꽃잎들이 비명을 지 르며 일제히 날카롭게 웃어젖혔다. 황야에 달빛이 환하게 내리고 있었다. 소년은 큰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 그 주위에 수도 없이 나뒹굴어 있는 시체들은 모두 노랗게 핏발이 선 눈을 흡뜨고 소년을 노려보았다. 구덩 이를 다 판 소년은 시체들을 모두 그 속에 굴려넣고 흙을 퍼 서 덮었다. 몸서리가 쳐지도록 고요했다. 시체들은 얼굴을 덮 는 흙 아래서 여전히 소년을 노려보고 있었다. 한준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 앉았다. 달빛이 방 안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는 떨면서 서둘러 불을 켜고 커텐을 내렸다. ...이것이 테스카틀리포카의 악몽인 가? 도저히 다시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앉은 채로 밤 을 새웠다. 하가 그룹의 강 회장, 성일 병원의 유 이사장, 전 외무장관 이자 3선 국회의원인 백 의원의 공통점은 후처와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처와는 모두 사별했는데, 묘하게도 그 시기가 동 일했다. 아들이 열 세 살 남짓했을 때였다. 사망원인은 병사였 으나, 어떤 병이었는지 쓰여 있지 않은 것도 똑같았다. "뭐하냐?" 조사한 기록들을 앞에 놓고 상념에 잠겨있는 한준을 보고 송 선배가 물었다. "...유채꽃...." "뭐?" "아,아니예요. 그냥 나온 소립니다." "유채꽃이 그냥 나온 소리라니, 너 좀 쌓이는 게 많은 모양 이지? 그러게 서경덕 할아버지 너무 흠모하지 말랬잖아." "유채꽃하고 성적 엄숙주의가 무슨 상관인데요?" "평소엔 영어 번역 혼자 다 하면서 왜 갑자기 무식한 척하 고 그래?" 한준은 송 선배가 간 후에 한영사전을 찾아보았다. '유채 ... rape' 한준은 뒤통수를 무언가로 세게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물론 한국어에서 유채꽃과 강간은 전혀 별개의 의미였다. 그러나 영어 문화권에 속한 나라에서는 어떨까? 강영후, 유재 웅, 백민호는 셋 다 20년 넘게 영어 문화권에서 살았다. 한준 은 사전을 밀쳐놓고 책상에 엎드렸다. 유채꽃, 살모殺母, 눈을 감지 않는 시체들. 테스카틀리포카의 꿈이 무엇을 뜻하는지 더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한준은 카바티나로 들어서서 홀을 둘러보았다. 박상우의 모 습을 찾아내고는 그를 지켜볼 수 있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한 시간쯤 지나자 박상우는 비틀거리며 화장실에 갔다. 화 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준은 소변기 앞에 서서 막 바지 앞섶을 헤치려는 참이던 박상우를 잡아끌고 맨 끝의 칸막이로 들어갔다. "어엇... 너 뭐야 새꺄!" "조용히 하세요. 저예요." "...아니, 귀한 몸이 웬일이셔?" 한준은 품 속에서 황 계장에게 받은 서류봉투를 꺼내어 박 상우에게 내밀었다. 박상우는 잔뜩 의심어린 표정으로 봉투와 한준을 번갈아 보았다. "중요한 사건 자룝니다. 전 감시받고 있어서 찾을 수가 없 어요. 여러 사람의 생명이 걸린 일이에요. 부탁합니다. 일간으 로 내주세요." "치워. 누굴 팔푼이로 아는 거야? 두 번은 안 속아." "그땐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겁니다. 선배님밖에 믿을 사람이 없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한준이 붙들고 통사정을 하자 박상우는 뜨악해하면서도 봉 투를 받아들었다. 한준은 대강 사건을 설명했다. "좋아, 속는 셈 치고 가보긴 하겠어. 하지만 기대는 하지 마. 기사가 될 지 안될 지는 검토해봐야 하니까." 다음날은 토요일이었다. 퇴근하는 길이던 한준에게 낯선 번 호로 호출이 왔다. 차에서 내려 전화해보니 오규섭이었다. 내 일 약속이 있느냐는 물음에 한준은 없다고 했다. "그럼 이천 온천에 다녀오자. 저번에 가봤는데 참 좋더라 구." "글쎄... 지금은..." 한준은 탐탁치 않게 대답하다가 문득, 테스카틀리포카에게 자신이 그 일에서 손뗀 것처럼 보이도록 놀러가는 것도 괜찮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 어디서 만날까?" "해돋이로 와. 아침 아홉 시까지 올 수 있지?" "홍재한테는 연락했어?" "...홍재는 왜?" 오규섭은 말을 더듬었다. "출국날짜 얼마 안 남았는데 기회 있을 때 얼굴 봐야지." "그러지 말고 우리 둘만..." 오규섭은 갑자기 말을 끊었다. 한준은 언뜻 그의 옆에 누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잠시 후에 다시 말했다. "그래. 같이 가자." "홍재한테는 내가 전화할께. 그럼 내일 봐." 홍재는 집에 있었다. 온천 얘기를 하자 좋아하며 승낙했다. "근데 규섭이 좀 이상하더라. 싸웠냐?" "알만하다. 나랑 가기 싫다지?"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그런 분위기였어." "하여간 좁쌀이라니까. 며칠 전에 내가 혜연이 그만 포기하 고 장가가라 그랬거든. 얼굴이 잔뜩 우그러져서 팩 일어나 가 버리더니 아직까지 꽁해 있는 거지. 어머니 말이 혜연이년, 어 제도 전화 한 통 없이 외박하고 지금까지 안 들어왔다는 거 야. 그런 말종이 뭐가 좋다고 망부석 돼서 앉았냐 말이야, 나 정말 한심해서. 그나저나 민호는 뭐래? 간다고 해?" "연락 안해봤어. ...바쁠 텐데 그냥 두자." 아침 일찍 여는 한식당 '해돋이'는 방배동에 있었다. 간단히 백반을 시켜 먹고 오규섭의 갤로퍼에 탔다. 오규섭은 홍재와 있기가 불편한지 내내 말이 없었다. 한준은 분위기를 띄우려 고 댄스 뮤직을 크게 틀어놓았다. 신갈 인터체인지를 지나서 십 분쯤 가다가 홍재가 오규섭에게 소리쳤다. "야, 꽁생원! 음료수 좀 없냐? 형님들 목마르다."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있던 한준은 오규섭이 움찔하는 것을 보았다. "...뒤쪽 발판 아이스박스에... 있어." 홍재가 차가운 음료수 캔을 꺼내 한준과 오규섭에게 하나씩 던졌다. 오규섭은 받아서 뚜껑도 따지 않은 채로 창틀에 얹어 놓았다. 한준과 홍재는 소리쳐 건배하고 마셨다. 한준은 하품을 하며 창 밖을 내다보았다. 졸음이 참을 수 없게 쏟아졌다. 한준은 가물가물한 눈을 감았다. 창작연재 (serial) [헌팅시즌] 제 3편 <꽃의 전쟁> -09- 등록자: realkj(김금주) 등록일: 07-11 조회수: 1543 제 9장 <꽃의 전쟁> 한준은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는 속에서 석양녘의 햇살 을 받고 있었다. 그는 오규섭이 운전석 문을 열고 나가는 것 을 몽롱하게 바라보았다. 오규섭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아후, 머리야... 으윽... 야, 여기 어디냐? 규섭이 자식은 어딜 간 거야?" 홍재가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한준은 조금씩 정신을 차렸다. 운전석이 비어있는 것을 보고 아까의 광경이 꿈이 아 니었음을 알았다. 좋지 않은 예감이 안개처럼 발 밑을 감쌌다. 한준은 홍재를 따라서 차 밖으로 나갔다. 한적한 도로변이 었다. 좀 떨어진 곳에 운전자를 대상으로 하는 듯한 조그만 가게가 하나 있었고, 그 앞에 깨끗이 닦인 평상이 놓여있었다. 과자봉지와 사발면, 소주박스 등속이 쌓여있는 가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준은 평상에 걸터앉았다. 멀리 기암괴석에 뒤덮인 산이 보였다.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펼쳐놓은 듯한 그 산을 한준은 어디선가 본 듯했다. "저놈들은 뭐야? 미친 놈들인가?" 홍재가 실소를 섞어 말했다. 산에서 눈을 돌린 한준은 이쪽 으로 다가오고 있는 한 무리의 사내들을 보았다. 모두 가죽 재질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반대편에서도 같은 차림의 사내 들이 오고 있었다. 한준은 어슴푸레한 땅거미 속에서도 그 가 면들이 독수리와 표범 비슷한 동물의 형상임을 깨달았다. ≪낮의 태양은 하늘을 나는 독수리이지만 저녁이 되면 힘 을 잃고 서쪽 지평선에 떨어져서 재규어로 변신, 땅 속 어둠 의 세계를 돌아다닌다. 이러한 태양의 두 측면을 섬기는 최고 위 전사들로 이루어진 독수리 군단과 재규어 군단은 아즈테카 의 군대 중 가장 강한 집단이었다.≫ "...주왕산" 한준은 떨면서 속삭였다. "뭐?" "저 산, 주왕산이야! 이럴 수가... 어서 도망쳐!" 한준은 있는 힘을 다해 갤로퍼 쪽으로 달렸다. 그 사람, 인 술을 베푸는 의사야. 유 박사 덕택으로 어머니 성일 병원으로 옮겨서 이달 말에 신장 이식 수술 받으시게 됐어. ...빌어먹을, 그 생각이 이제서야 나다니. 시동을 걸려다가 키가 없음을 알 았다. "홍재야, 어떻게 해봐! 어서 여기를 빠져나가야 해!" "규섭이가 아직 안 왔는데..." "그 자식은 오지 않아! 홍재야, 빨리!" 홍재는 연료계를 가리켰다. 화살표가 끝에 떨어져 있었다. 한준은 창 밖을 보고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어느새 다가온 독수리와 재규어들에게 겹겹이 포위되어 있었다. "이거 뭐가 이래. 한잠 자고나니 느닷없이 경상도에 와 있 질 않나, 친구놈은 말도 없이 사라져버리질 않나, 게다가 창 밖에는 미친 놈들이 가득하고." 홍재는 어이없다는 듯 툴툴거리더니 차문을 벌컥 열고 나갔 다. 우선 손에 잡히는 대로 두 명을 들어 메치고 사내들을 쓸 어내기 시작했다. 가면들도 하나같이 유도선수만큼 우람했지 만 코끼리에게 덤벼드는 개떼처럼 홍재와는 상대가 되지 않았 다. 마치 불도저에 밀리듯 포위망이 뚫렸을 때 홍재의 등 뒤 에서 지직거리며 양극의 전류가 합쳐지는 불꽃이 일었다. 전 자충격기에 찔린 홍재는 한순간에 쓰러졌다. 한준 옆의 문이 열렸다. 사내들에게 끌려가며 한준은 정신 을 잃고 쓰러져 있는 홍재를 돌아보았다. 재규어 몇이 그를 떠메어 옮기고 있었다. "이봐요, 저 사람은 보내주시오. 아무 상관 없는 사람까지 데려갈 건 없잖아요. ...제발, 그냥 놔줘요." 가면들은 대답없이 한준을 지프에 태우더니, 그에게 안대를 씌우고 손을 뒤로 돌려 묶었다. 자갈길로 한 시간쯤 달리다가 포장도로에 들어선 듯 갑자기 진동이 사라졌다. 한참후에 육중한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 려왔다. 철문을 한 번 더 지나서 차가 멈췄다. 가면 둘이 양쪽에서 한준의 팔을 끼고 차에서 끌어냈다. 건 물 안인 것 같았다. 긴 계단을 두 번 돌아서 걸어가다가 멈춰 섰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한준은 안으로 밀어넣어졌다. 뒤에서 문이 닫혔다. 그곳에는 여러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보이지는 않았으나 한준은 그들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묶인 손을 힘껏 주먹 쥐면서 태연하게 보이려 애썼다. "어서 와, 쇼치필리." 메탈 베이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한준은 혀를 깨물어 터져나오는 신음을 억눌렀다. 누군가의 손이 한준의 얼굴을 만졌다. 한준은 그를 피하려다가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후훗, 이거 정말 걸작인데. 사람들 앞에서 날 공개 망신 시 키던 정의의 사도가 오줌을 쌀 지경으로 벌벌 떨고 있다니.... 울면서 빌면 혹시 살려줄 지도 모르지." 그 목소리는 분명 강영후의 것이었다. 한준은 그쪽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입닥쳐, 미친 자식아. 시궁창 쥐 같은 자식아. 아버지 후광 아니었으면 약이나 살인에 쩔어 인생 마감했을 쓰레기 따위한 테 누가..." 배에 거센 발길질이 들어왔다. 멱살을 잡혀 일어난 한준은 턱에 일격을 맞고 벽에 부딪쳤다. "그만 해둬. 제사 전에 피 보고 싶지 않아." 유재웅의 목소리였다. 한준은 문득 유재웅과 테스카틀리포 카의 어조가 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재웅은 테스카틀 리포카처럼 모음을 끌면서 발음하지 않았다. 강영후의 거친 숨결이 한준의 얼굴에 끼얹어졌다. 그는 한 준의 멱살을 놓고 물러서며 중얼거렸다. "좋아. 시간은 충분하니까." "서한준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다들 잊었나?" 누군가가 침착하게 말했다. 한준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 목소리에 몸을 떨었다. "...민...민호..." "룰을 어긴 건 네 친구가 먼저야. 살려둘 수 없다는 걸 알 면서 억지부리지 마." 유재웅이 말했다. "꼭 죽여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 입을 막는 게 목적이면 다 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어. 차차 봐가며 결정해도 늦지 않아." 테스카틀리포카의 목소리였다. 그러자 "그 말이 맞아. 우리 끼리 싸우는 건 위험해." 낯선 목소리가 거들었고, 동조하는 말들이 뒤따랐다. "그럼 그렇게 하지. 우선 지금은 재미 좀 보자구." 강영후의 비웃음띤 목소리가 다가왔다. 백민호가 그를 막아 섰다. "그냥 놔둬." "너도 저 자식 미워하잖아. 왜 사사건건 싸고 도는 거야? 놔두고 보기만 하려고 잡아온 건 아니야!" 둘 사이에 몸싸움이 있는 듯했다. 발소리들이 우르르 그쪽 으로 몰려갔다. 한준의 뒤쪽에서 문이 열렸다. "지하로 데려가." 유재웅의 목소리가 냉랭하게 말했다. 한준은 다시 가면들 사이에 낀 채로 끌려나갔다. 한참 걷다 가 멈춰섰다. 무언가 스르릉 밀려나는 소리가 난 후에 올라선 것은 엘리베이터였다. 하강속도가 너무 빨라서 속이 울렁거렸 다. 끝도 없이 계속될 것 같던 낙하가 멈추고 밖으로 나왔다. 복도를 걸어가는 한준의 코 끝으로 기묘한 향기가 스쳤다. 언젠가 집에서 맡았던 그 향은 아니었으나 비슷한 느낌의 것 이었다.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한준은 떠밀려 안으로 들어갔 다. 안대가 벗겨지고 손도 자유로워졌다. 한참만에 빛을 본 한 준이 무리없게 눈을 뜰 수 있을 정도로 어두운 방이었다. 가 면은 문 밖에서 잠금 번호를 누르고 가 버렸다. 쇠창살을 통해 복도를 따라 길게 늘어서 있는 감방들이 보 였다. 사람이 들어있는 것 같았으나 무덤 속처럼 조용했다. 그 순간 한준은 자신이 이상할 정도로 축 처져있는 것을 느꼈다. 얼핏 이 향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점점 머리가 멍해와서 뭔가를 집중하여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한준은 침대 에 무너지듯 엎어져 그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준은 비몽사몽 간에 문쪽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재규어 가면이 문 옆의 번호판을 누르고 있고 그 옆에 강영후가 서있었다. 강영후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한준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영후는 침 대 옆 붙박이 탁자에 음식이 담긴 쟁반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 았다. "손수 서빙까지 해주시니 황송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군. 살 찌워 잡아먹을 생각인가?" "네 손으로 먹지 않겠다면 목구멍에 호스를 끼워서 처넣어 줄 수도 있어. 좋을대로 해. 난 그걸 보는 게 더 재밌을 것 같 으니까." "이 기분나쁜 향은 네 작품이지? 사람을 순한 바보로 만드 는...." "마음에 들어? 이것 말고도 각기 다른 효능을 가진 열 한 가지가 더 있어. 너한테는 특별히 모두 맛보여줄 테니까, 기대 하라구." "집어치워." 테스카틀리포카가 풀어놓았던 미향도 그것들 가운데 하나였 을 것이다. 한준은 띵한 머리를 눌렀다. "귀한 제약비법을 배워서 이런 짓에나 쓰다니..." "그럼 어디에 쓰지? 안락사에?" 한준은 고개를 돌려 복도 건너편의 다른 감방을 바라보았 다. "홍재는 어디 있어?" "편안히 있으니 신경쓸 것 없어." "그는 돌려보내줘.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까지 끌어들이지 마." "무슨 소리야, 끌어들인 건 너야. ...홍재한테는 연락했어? 출국날짜 얼마 안 남았는데 기회 있을 때 얼굴 봐야지." 강영후는 한준의 목소리로 말했다. 흉내 정도가 아니라 똑 같았다. 한준은 오한을 느꼈다. "...어제 규섭이 옆에 있던 게 너였군." "훗, 그 친구는 어쩔 수 없었지. 재웅 형한테 어머니의 생사 가 달려 있었으니까.... 게다가 사랑하는 여자까지 잡혀 있었 지. 네 덕분에 두 여자가 살게 됐으니 보람있는 일이잖아?" 강영후는 웃으며 한준에게 스푼을 내밀었다. 한준은 식판을 들어 벽에다 내동댕이쳤다. 빵과 수프가 뒤섞여 바닥에 흘렀 다. 한준은 발밑으로 굴러온 어떤 물체를 내려다보았다. 수프 에 담겨있었던 듯 걸쭉한 물이 흐르는 붉게 익은 손가락이었 다. 잘린 밑둥에 루비 박힌 금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케찰코아틀이 되겠다는 용사가 얼굴이 말이 아닌데. 직접 스푼으로 떠서 봤으면 심장마비라도 일으켰겠군." "...황...계장님한테...무슨...짓을..." 강영후가 크게 웃었다. 한준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그는 앞으로 쓰러지며 의식을 잃었다. 높은 돔형의 천장은 꽃과 돌, 태양이 그려진 스테인드 글라 스로 장식되어 있었다. 성당 같은 느낌의 방안 가득 햇빛이 퍼져 있고, 열려 있는 창을 통해 선선한 미풍이 불어왔다. 한준은 누운 채로 고개를 돌리다가 옆의 의자에 앉아있는 백민호를 보았다. 그들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여긴 어디야?" "내 방이야." "강영후가 날 이리 옮겨놓으라고 했어?" "영후는 널 자기 방으로 데려가고 싶어해. 그 방에 들어가 면 넌 살아나오지 못한다." "왜 이런 짓들을 하는 거야? 세상을 존속시키려면 산 인간 의 심장이 필요하다는 그런 얘기를 진심으로 믿어?" 백민호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세상을 위해서라는 생각 따윈 없어. 우린 그저 뭔가를 죽 이고 싶을 뿐이야." "...제정신이 아니구나." "제사는 오늘밤이야. 넌 그 후에 돌아가게 될 거야." "네 친구들이 날 무사히 보내줄 거라고? 웃기지 마." "무사히 갈 거란 말은 안했어. 목숨만 붙여두는 거지. 솔직 히, 죽는 편이 더 나을 거야." 백민호는 옆 탁자에 놓아두었던 주사기를 집어들었다. 푸르 스름한 액체가 채워져 있었다. 한준은 몸을 일으키려다 두 팔 과 다리가 침대의 네 기둥에 묶여있는 것을 알았다. "걱정할 거 없어. 주사는 많이 놔봤으니까." 그는 한준의 턱을 잡고 목에 주사바늘을 찔러넣었다. 뇌가 스펀지가 되어 푸른 용액을 빨아들이는 듯한 감각에 한준은 몸서리를 쳤다. "...무슨...짓...이야..." 방안은 갑자기 거센 폭풍을 만난 배가 되었다. 가구들이 기 묘하게 이지러져 흔들리고 스테인드 글라스가 쏟아져내릴 것 처럼 부풀어올랐다.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한 멀 미가 엄습해왔다. 현기증은 잠시 사라졌다가 더 강하게 덮쳐 들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끝없이 되풀이되었다. 한준은 백 짓장 같은 얼굴로 고개도 가누지 못하고 힘없이 늘어졌다. 돌침상 위에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사지를 벌린 채 누워 있 었다. 피에 물든 흰 옷을 입은 제관 넷과 제사장 한 명이 그 를 둘러싸고 서있었다. 옥좌에 앉은 토나티우가 고개를 끄덕 이자 제사장이 돌칼로 남자의 가슴을 찢었다. 힘차게 박동하 고 있는 심장을 꺼내어 토나티우를 향해 치켜들었다. 심장은 곧 독수리가 조각되어 있는 둥근 돌그릇 속으로 던져졌다. 그 속에는 아직도 꿈틀거리며 피를 뿜어내는 수많은 심장들이 담 겨 있었다. 제관들은 남자를 돌침상에서 끌어내려 계단 밑으로 굴렸다. 남자는 바닥에 겹겹이 쌓여있는 시체더미 위로 떨어졌다. 한 준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으나 의식만은 또렷했다. 그 남자는 홍재였다. 시체들은 재규어와 독수리 가면들에 의해 운반되어, 굉음을 내면서 돌아가는 광석 파쇄기의 컨베이어 위에 올려졌다. 하 나씩 핏줄기를 뿜으며 파쇄기의 입 속으로 들어갔다. 기계의 배출구를 통해 형체가 사라진 살덩어리들이 뭉클뭉클 떨어져 내렸다. ...왜... 이런 짓을 하지? 시체가 눈을 감지 않으니까.... 여전히 나를 노려보고 있으니 까, 쇼치필리. 오규섭의 갤로퍼 안이었다. 운전석에는 가슴이 파헤쳐진 홍 재가 앉아 있었다. 한준의 옆좌석에는 오규섭의 상반신이 놓 여 있고, 하반신은 좌석 밑에 던져져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뜨겁게 쏟아지는 차 안에는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한준은 몇 번이나 해가 뜨고 졌는지 알지 못했다. 시체들이 썩어가고 있 었다. 두런두런하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한준은 고개를 들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넓은 방안을 걸어다니거나 휠체어 를 밀면서 움직이고 있었다. 계속 몸을 떨고 있는 사람도 있 었고 멍하니 앉아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방 한쪽에 있는 큰 유리 너머로 일지에 뭔가를 써넣으면서 이쪽을 살피고 있는 간호사가 보였다. 한준은 자기가 입고 있는 환자복 소매에 연속 무늬로 찍힌 '성일병원'이라는 글자를 보았다. 주왕산에서 일어났던 일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한준은 이를 악물고 터져나오는 비명을 삼켰다. ...경솔하게 굴지 마. 현명하게 행동해야 한다. 놈들을 경계시켜선 안돼. "드디어 깨어났군요. 사람 소리가 들리는 곳에 있으면 좋아 질까 해서 오락실에 나와 있게 한 것인데 효과가 있었다니 다 행이오. 그래, 기분은 좀 어떻습니까?" 한준은 고개를 들었다. 유재웅이 친절한 미소를 띤 얼굴로 옆자리에 앉았다. 레지던트들이 늘어서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 었다. "일주일 전 서울 근교의 강변에서 발견된 이후로 당신은 계 속 의식불명이었소. 당신이 타고있던 차의 그... 상황 때문에 경찰이 우리 병원에 위탁했어요. 이제 상태가 호전되는 대로 조사가 있을 겁니다. 언론은 아직 당신의 일을 모르고 있소." "......." "고모님이 매일 들르시죠. 당신이 깨어난 것을 알면 기뻐하 실 겁니다." 유재웅은 자상한 주치의였다. 한준 역시 모든 것을 믿고 맡 기겠다는 표정으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기계가 시체들을 끊임없이 토해내고 있 었다. 새파란 인광을 내뿜는 한 무리의 재규어가 시체들을 물 어서 검게 칠한 기차 속으로 옮겨놓았다. 검은 기차의 좌석은 시체 승객으로 가득 차있었다. 검은 옷의 사내가 그들의 머리 위를 떠다녔다. 재규어가 홍재를 물어왔다. 흰 옷을 입은 그는 정신을 잃고 있었으나 아직 가슴에 온기가 남아있었다. 그에게 검은 옷의 사내가 긴 머리카락을 끌면서 다가갔다. (안돼, 그러지 마!) 검 은 옷의 사내는 불에 달구어진 얼음칼을 높이 치켜들었다가 홍재의 심장에 찔러넣었다. (안돼, 안돼, 안돼―!) 뜨거운 피가 검은 옷 사내의 얼굴에 가득 끼얹어졌다. 그의 허리에는 어머 니와 아버지의 머리가 매달려 있었다. 시체들이 일제히 눈을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누군가의 손이 한준을 세차게 흔들었다. 경련을 일으키며 비명을 지르던 한준은 한참만에야 간호사의 얼굴을 알아보았 다. "진정하세요, 진정해요. ...괜찮으세요?" 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간호사는 이마를 짚어보았다. "물 좀 드릴까요?" "...고마워요." 간호사가 가고 난 후에 한준은 병상에 일어나 앉았다. 문에 붙어있는 유리를 통해 복도의 불빛이 들어왔다. 약해지지 마 라. 미치면 안돼. 박상우 선배의 기사가 곧 나올 거야. 그가 못 쓰겠다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세상에 알려야 해. 그 럴려면 어서, 어서 이곳을 나가야 하는데... 홍재야, 도와줘... 내가 미치지 않게. 그는 피가 나도록 팔뚝을 물어뜯었다. 미치 면 안돼. 모든 것이 끝장이야. 간호사의 일지에 기록된 한준은 조용하고 경과가 좋은 환자 였다. 오락실에서 그는 언제나 말없이 포커를 하고 있거나 책 을 읽고 있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듯 비명을 지르지만 끔찍한 사고를 당한 후에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증상이며, 또 한 그것이 평상시의 상태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듯하다는 프로그레스의 기록도 눈에 띄었다. 언제쯤이면 심문을 위한 면담이 가능하겠느냐는 경찰측의 독촉으로 열린 회의에서, 대 부분의 의견은 통원 치료를 해도 무방하다는 쪽이었다. 유재 웅은 소견을 묻는 원장의 질문에 뜻모를 미소를 지으며 "좀 더 지켜봐야지 않겠습니까" 라고만 했다. 한준은 환자들과 포커를 하고 있었다. 그는 고모가 자신의 퇴원 문제로 과장실에서 유재웅과 상담 중인 것을 알고 있었 다. 아직도 유재웅이 무사한 걸 보면 박상우가 그 기사를 내지 않을 작정임은 분명했다. 한준은 나가는 대로 수사기록을 돌 려받아서 우선 경찰에 출두할 때 제출하고, 각 언론사와 수사 기관에 보낼 생각이었다. 심윤석이 아직 살아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서한준 씨, 면횝니다." 한준은 고모도 왔는데 누굴까 의아해하며 면회실로 갔다. 송 선배가 와 있었다. "여기 웬일이세요?"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한 달 동안 소식 한 장 없이 어딜 가 있나 했더니.... 네 고모님이 국장님한테만 얘기해논 걸 달 달 볶아서 알아냈지. 최통한테 받은 스트레스가 그렇게 컸는 줄은 몰랐다." "잡지는 어떻게, 잘 나왔어요?" "너 없으면 문 닫기라도 할까봐서? 걱정해줄 기운 있으면 월간 K나 해줘. 하루 아침에 기둥이 빠져버리니까 흔들흔들한 가 보더라구." "...월간 K가 왜요?" "어? 너 몰랐구나...? 그럼 그냥 모른 채로 있어라. 유쾌한 얘기도 아니고, 너 몸도 안 좋은데...." "무슨 일이냐니까요!" "...그러니까.. 너 없어지고 한 이틀 훈가, 종각 지하상가 쓰 레기통에서 사람 머리가 하나 발견됐는데... 그게 박상우였다 는 거야." 고모가 들어왔다. 송 선배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는 그의 옆자리에 앉다가 한준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아니, 너 왜 그러냐?" "...저기... 제가 좀 놀랄 만한 얘기를 했습니다." 고모는 잠시 못마땅하게 송 선배를 흘겨보고는 한준에게 시 선을 돌렸다. "한준아, 유 선생 말로는 그렇게 서둘러 퇴원하는 건 위험 하다는구나. 원체 쇼크가 컸기 때문에 후발적으로 증상이 나 타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거야. 그러니 미국에 가서 정밀검사를 한 번 받아보는 게 어떻겠니? 유 선생 모교인 대 학병원이라는데..." "안돼요." 고모는 한준의 손을 잡고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한테 더 나은 치료를 받게 해주려는 거야. 갑갑하더라도 조금만 참아라. ...임 차장댁 말이, 언젠가 한 번은 감시 카메 라를 찾는다고 집을 다 뜯어놓은 적도 있다면서? 그 나이 되 도록 사내 혼자 살다보니 외로워서 그런 거야. 유 선생도 적 절한 치료를 받은 후에 마음 맞는 사람하고 결혼하면 좋아질 거라고..." "안돼요! 난 어서 여기를 나가야 해요! 그놈들은 날 정말로 미치게 하려는 거예요!" "진정하시오, 서한준 씨.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유재웅이 한준의 등 뒤에서 말했다. 한준은 벌떡 일어서서 그를 노려보았다. "<꽃의 전쟁> 파일을 어떻게 했어?" 갈라진 목소리가 히스테릭하게 떨렸다. 누가 들어도 정상이 아니었다. "한준아, 그게 무슨..." "어쨌냔 말이야!" "오늘 면회는 이만 마치기로 하지요. 환자 상태가 좋지 않 군요." 유재웅이 고모와 송 선배에게 양해를 구하는 얼굴을 했다. 그러나 한준은 자신을 향해 보내는 그의 조소섞인 눈길에서 다음의 말을 똑똑히 읽었다. 태워버렸지, 말끔하게. 아주 잘 타더군. "안돼―!" 한준은 찢어질 듯 높은 쇳소리로 오래도록 비명을 질렀다. 고모가 놀란 얼굴로 물러섰다. 한준은 둘러선 사람들을 밀치 며 달려나갔다. 병동을 차단하는 철문은 면회시간 중이라 열 려 있었다. 한준은 문 앞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혔다. "이것 놔! 난 나가야 해! 놓으란 말이야! 아아악―" 한준은 사력을 다해 발버둥쳤다. 소매가 말려 올라가며 잇 자국의 피멍으로 뒤덮인 양쪽 팔뚝이 드러났다. "죄의 대가를 받게 될 거야! 살인귀 놈들... 너희가 저지른 짓을 세상이 모두 알게 될 거야!" 그의 어깨에 주사바늘이 꽂혔다. 유재웅의 얼굴이 여러 개 로 흔들렸다. 유재웅은 한준의 동공이 풀린 것을 확인하고 병 실로 옮기라는 손짓을 했다. "오늘 꽤 재밌게 굴었다면서? 그따위로 행동하다니, 인간 대접을 받는 게 과분했던 모양이지?" 강영후의 목소리였다. 한준은 그를 보려 했으나 눈이 뜨이 지 않았다. 마치 풀칠해놓은 것처럼 눈꺼풀이 붙어있었다. "놀라지 마, 쇼치필리. 내가 풀어주기 전에는 떠지지 않아." 테스카틀리포카가 말했다. 한준은 두 팔과 두 다리가 병상에 묶여있는 것을 알았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깨달은 그는 몸서리를 쳤다. "그만둬... 그 주사만은 놓지 마." "투정부리기엔 너무 늦었잖아?" 유재웅이 냉랭하게 말했다. 한준의 코 끝에 익숙한 오드콜로뉴의 냄새가 스쳤다. 한준 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민호야, 제발 날 나가게 해줘. 잊지 않을께... 한, 한 번만 도와줘" 백민호는 대답이 없었다. 강영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소용없어. 이건 내가 너를 제물로 받지 않은 반대급부니까. 정신을 차렸을 때는 뉴욕의 내 별장에 있게 될 거야. 후후후... 내가 널 어떻게 할지 가르쳐줄까? 한국으로는 병원에서 발작 이 심해져 죽었다고 서류 한 통 보내면 그만이야." 강영후가 한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한준은 눈에 보일 정 도로 떨고 있었다. 누군가가 한준의 턱을 잡아눌렀다. 차가운 바늘이 목을 뚫고 들어왔다. "괜찮아, 쇼치필리. 내가 언제나 함께 있어." "...부탁이야... 날 죽여줘." "......." "당신한테 그 정도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니잖아? ...제발... 이 렇게 살고 싶지 않아" "그건 안돼, 쇼치필리." 한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신음하며 흐느꼈다. 테스카틀리포카가 머리칼을 쓸어주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울지 마. ...괜찮아, 쉬... 이건 꿈이니까...." 네티즌광장 서비스 바로가기 ------------------- 메일 검색 메신저 iman 게임 ------------------- 커뮤니티 네티즌광장 동호회/작은모임 시티조인 ON & OFF 채팅 ------------------- 컨텐츠 만화/무협 게임 방송/영화 음악 성인 교육/키즈 여성/생활 증권/경제 ------------------- 쇼핑 공동구매 ------------------- 인터넷비즈니스 고객센터 회사소개 하이텔홈 > 커뮤니티> 네티즌광장> 창작연재 창작연재 (serial) [헌팅시즌] 제 3편 <꽃의 전쟁> -完- 등록자: realkj(김금주) 등록일: 07-12 조회수: 1864 "한준아, 일어나. 다 왔어." 오규섭이 말했다. 한준은 소리를 지르면서 몸을 일으켰다. 뒷좌석에서 홍재의 타박이 날아왔다. "내 잘 자다가 갑자기 악은 왜 써? 간 떨어지겠네." 한준은 홍재를 돌아보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안도감이 온몸으로 따스하게 퍼져나갔다. "그래, 안다. 너무 잘 생겨서 볼 때마다 놀랍지? ...어? 너 우냐?" "...다행이야... 다행이야..." "귀신 꿈이라도 꾸셨나? 쌤통이야. 친구들하고 오랜만에 놀 러 오면서 잠만 자니까 벌받은 거라구." 정오가 조금 지나 있었다. 그들은 이름난 산나물밥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규섭은 그 사이 홍재와 화해를 했는지 출발 하던 때와 달리 웃으며 어울렸다. 오규섭은 탕에 있는 시간보다 휴게실에서 자는 시간이 더 길었다. 홍재는 또 나가는 그의 꽁무니에 대고 "야, 여기 온천 이 좋다던 얘기가 물 칭찬이 아니고 휴게실 칭찬이었냐?" 하 고 소리쳤다. 한준은 계속 홍재 옆에 붙어앉아 있었다. 꿈을 꾸고 나서야 홍재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 와 함께 세상의 햇빛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기뻤다. "혜연이는 들어왔어?"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한준이 물었다. 홍재가 오규섭을 힐끗 쳐다보았다. "응, 어젯밤에 왔대. 어머니가 된통 혼냈다더라. 도대체 정 신이 있는 계집애냐? 누군지 몰라도 남편될 놈, 아마 홧병으 로 죽을 거야." 들으라는 듯한 말에도 오규섭은 묵묵히 어두운 도로만 응시 하고 있었다. 한준은 올 때 걸어놓았던 댄스 뮤직을 다시 틀 었다. "이번 주 금요일에 출국하지? 몇 시 비행기야?" 오규섭의 질문에 홍재는 손을 내저었다. "나오지 마. 가고싶지도 않은 타향길 울면서 가게 할래?" "싫으면 그냥 있으라니까. 누가 등이라도 떠밀어? 가지 말 라구." 한준은 창 밖으로 시선을 둔 채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홍 재는 앞에 앉은 한준의 뒷머리 밖에 볼 수 없었다. "있지, 등 떠미는 녀석." 홍재도 자기 옆의 창을 내다보며 혼잣말을 했다. 홍재와 한준은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서로 외면하고 있었 다. 그리고 둘 다 그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수요일 아침 K일보의 1면 톱기사로 <꽃의 전쟁>이 실렸다. 지금까지의 수사기록과 하가 호텔 전 사장인 심윤석의 증언, 그리고 양수리 사건과의 연관 등이 자세하게 보도되어 있었 다. 물샐 틈 없는 보안 시스템을 갖춘 거대한 성채―주왕산의 별장에 대한 설명도 보였다. <......지상과 지하를 연결하는 건 벽으로 위장된 엘리베이터 이다. 지하 3층에는 삼십 명의 수용이 가능한 규모의 사설 감 옥이 있다. 집단 살인이 자행된 장소는 지하 4층의 '신전'으로, 희생자를 의식에 따라 살해한 후, 광석 파쇄기로 시체를 갈아 서 땅에 묻었다. 2년 전 의문 속에 실종된 영화배우 민은정과 몇 달 전 소식이 끊겼던 가수 남유미 역시 이곳에서 살해당한 것이 확실시 되고 있다......> 그 주에 심윤석과 외아들 클럽 전원이 구속되었다. 윤 검사 는 의식은 회복했으나 아직 면회사절이었고, 황 계장은 엄중 한 보호를 받으며 다시 검찰청에 출근했다. 한준은 참고인으 로 계속 불려다녔다. 외아들 클럽 회원들의 사회적 지위와 집 안 배경으로 인해 여론의 파장은 더욱 커져만 갔다. "지금 지하 커피숍에 있어요. 시간 좀 내주세요." 정혜연이었다. 한준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어...그래. 곧 내려갈께." 그녀가 찾아온 이유를 알기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 한준 이 사무실 밖으로 나오자 복도의 소파에 앉아있던 경찰이 일 어섰다. 며칠 후에 열릴 <꽃의 전쟁> 3차 공판에서 검찰측 증인으로 신청된 한준은 보름 넘게 내근으로 돌려져서 경찰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정혜연은 평소 성격답지 않게 구석자리에 앉아있었다. 한준 은 그 앞에 앉으며 경찰이 정혜연의 바로 뒷자리로 가는 것을 보았다. "어제 홍재한테서 전화왔더라. 스포츠 센터 오픈이 모레라 던데 안 가볼 거야?" "......." 한준은 자신을 쏘아보는 정혜연의 시선을 피하면서 음료수 를 주문했다. "증인으로 나간다면서요?" 정혜연의 날선 목소리가 날아왔다. "친구를 도와는 못 줄망정 죽을 자리로 밀어넣어요?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닌 한준 오빠가 그럴 수 있어요. 그런 줄 몰랐 더니 오빠, 아주 악랄한 사람이군요." 한준은 얼핏 경찰의 눈치를 살폈다. 신문을 펴들고 있었으 나 이쪽에서 하는 말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것이었다. "혜연아, 잠깐만..." "만약 한준 오빠가 그런 상황에 처해 있다면 민호 씨는 무 슨 짓을 해서라도 구해줄 거예요. 그런데 오빠는 그런 친구를 죽이겠다구요?"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덮어줄 수 없는 일이 있어." "닥쳐요! 오빠는 그런 소리 할 수 없어요. 민호 씨가 어떤 여자하고도 오래 못 가는 게 누구 때문일 거라고 생각해요? 천 명의 여자가 아니라 단 한 명의 남자를 원하기 때문이죠. 바로 서한준, 당신을 말예요!" 한준은 눈을 크게 뜨고 정혜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입술 을 힘껏 깨물고 있었다.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민호는..." "난 정말 당신이 싫어. 우리 오빠만 아니었으면 그냥 두지 않았어. 벌써 예전에 민호 씨 곁에서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을 거라구. ...민호 씨한테 해를 입히면, 당신도 절대 무사하지 못 할걸." "실례합니다. 잠깐 좀 보실까요." 한준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다가온 경찰이 정 혜연을 일으켜 세웠다. 정혜연은 한준에게 증오에 찬 시선을 던지며 끌려 나갔다. 한준은 혼란에 빠져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재판정은 치열한 취재경쟁으로 마치 방송국 스튜디오를 방 불케 했으나 외아들 클럽은 시종일관 침착했다. 방청석에서 최나미를 발견한 것은 심리 시작 후 얼마 안돼서였다. 그녀는 소리죽여 울고 있었다. 폐정 직후에 한준은 외아들 클럽을 악착같이 따라붙는 박상 우를 보았다. <꽃의 전쟁>으로 또 한 차례의 특종을 따낸 그 는 한껏 의기양양해 있었다. 1심에서는 외아들 클럽이 중증의 정신질환을 앓고 있음을 인정하여 형집행이 불가하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검찰의 항소 로 열린 2심에서는 1심의 판결을 뒤엎고 여섯 명 전원에게 사 형선고가 내려졌다. "그 동안 고생 많았네. 어쨌든 이젠 한숨 돌렸구만. 재판 때 마다 불려다니느라 힘들었지?" "아닙니다, 국장님." "밖에 나가서 시원한 공기 좀 쐬고 오겠나? 몇 년 나가있다 보면 다 잊어버릴 수 있을 게야. 서 사장님께서는 노발대발하 시겠지만" "...밖...이라니요?" "뉴욕 특파원 자리가 비었어. 해볼텐가?" 황 계장은 집으로 찾아온 한준을 반갑게 맞았다. 잠시 서로 의 안부를 묻고 나서 한준은 특파원으로 발령받은 얘기를 했 다. "운이 좋았구만. 입사하고 보통 십 년은 넘어야 명함이라도 내밀 수 있는 자린데" "국장님 배려가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었죠." 사실, 한준에게 있어서 백민호의 사형 집행 소식을 듣지 않 아도 되는 것 이상의 배려는 없었다. "어쨌든 좋은 일이니 축하해. 난 좀 섭섭하네만." 한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3심은 언젭니까?" "한달 좀 안 남았어. 통상 서류심리인데 시간만 끄는 거지. 법률적 하자 없고, 2심 재검사 결과 제 정신인 것 확실하고.... 비벼볼 구석이 없지 않나. 몇 주 안에 끝날 거야." 한준이 케네디 국제공항에 도착한 것은 밤 여덟 시가 지나 서였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오다가 로비에 늘어서 있는 피 켓 사이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했다. 동양남자 둘이 그 피켓 아래 서있었다. "지사에서 나오셨습니까?" "서한준 씨?" 40대로 보이는 남자가 반색을 했다. 옆의 청년이 피켓을 내 렸다.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비행기가 계속 연착이 돼 서..." "별 말씀을 다 하시오. 난 김호영이오, 이쪽은 양 기자고." 40대 남자가 붙임성좋게 웃으며 옆의 청년을 가리켰다. "잘 부탁합니다." "부탁이야 우리가 해야죠. 자, 먼 길 오느라 피곤할 텐데 어 서..." 말을 하다 말고 김호영이 입을 벌린 채 한준의 어깨 너머를 주시했다. 한준이 막 돌아보려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한준을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죽일놈, 나한테는 말도 없이 첩자처럼 잠입해? 너 같은 놈 은 목을 콱 졸라버려야 해." 김호영과 양 기자가 몇 발짝 뒤로 물러섰다. 한준은 숨이 막히는 중에도 그들의 얼굴을 보고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괜찮아요. 제 친굽니다. ...야, 그만해. 놀라시잖아." 홍재는 팔을 풀고 한준 옆에 섰다. 처음 보는 사람은 놀랄 만도 했다. 맨몸 위에 가죽점퍼를 걸치고 진바지에다 웨스턴 부츠를 신은 미스터 올림피아였다. 한국을 떠날 때보다 한층 우람해져 있었다. 김호영은 여전히 긴장한 얼굴로 홍재와 악 수를 나눴다. "오래 기다려주셨는데 죄송합니다. 이 친구가 올 지 몰랐어 요." "아닙니다.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친구분하고 회포를 풀어 요. 정식 인사는 내일 하기로 하지요." 홍재는 렌트했다는 포르셰를 능숙하게 몰았다. 상쾌한 바람 이 전신을 휘감았다. 한준은 좌석에 편하게 기대앉아 기지개 를 켰다. "내가 오늘 오는 건 어떻게 알았어?" "하여간 넌 많이 맞아야 돼. 말하고 오라고 내가 한 달 전 부터 신신당부했어, 안했어?" "바쁜데 번거로울 것 같아서 그랬지. 몬트리올에서 여기까 지..." "비행기로 오면 담배 한 대 피울 시간 밖에 안되는 거리에 번거로울 일 퍽도 많겠다." "규섭이 어머니, 수술하신 것 알아?" "아니. 성일 병원에서 그 전에 계시던 병원으로 옮기셨단 말만 들었는데?" "얼마 전에 기증자가 나섰어. 닷새 전에 수술하셨는데 경과 가 좋대." "야, 오랜만에 기쁜 소식이구나. ...근데 규섭이 놈은 왜 나 한테 그런 얘기 안하는 거야? 나와있다고 괄시하나?" "걔가 지금 무슨 정신이 있겠어. 나도 물어물어 안 거야." "하긴 어머니 그러신데 혜연이까지..." 말하다말고 홍재가 슬쩍 한준의 눈치를 살폈다. "혜연이가 너 증인 서는 일로 여러 번 난리쳤다며?" "......." "이해해라. 시간 지나면 정신 차리겠지." 한준은 말없이 렉싱턴 애버뉴의 화려한 야경을 바라보았다. 질서있게 늘어선 빌딩숲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 포르셰의 양 옆으로 지나쳐갔다. 홍재 역시 의식적으로 백민호의 이야기는 피하고 있었다. 푸른색 블록을 전용하고 있는 웅장한 호텔 앞에 차가 멈췄 다. 도어맨이 달려와 열쇠를 받아들었다. 한준은 휘황한 네온 사인이 그리고 있는 글자를 올려다보고 입을 벌렸다. "...워,월도프 아스토리아?" "뭐해? 거기서 밤샐래?" "너... 돈이 그렇게 많아?" "주체를 못할 지경이다." 홍재는 객실 둘을 주문했다. 별 다섯 개짜리 호텔의 호화로 운 로비를 둘러보고 있던 한준이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하나만 해. 그 돈을 어떻게 다 감당하려고 그래?" "트윈룸 쓰는 두 남자에게 쏟아지는 눈총을 감당해내는 것 보단 나을걸. 여긴 서울이 아니라구." 한준은 엘리베이터 안에서부터 조금씩 졸고 있었다. 홍재가 짐을 들어다 준 웨이터에게 팁을 주고 돌아서니 한준은 의자 에 길게 앉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씻고 자." "...으응?" "하여간 불가사의하다니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펄펄 날던 놈이 갑자기 절인 배추가 되는 건 또 뭐야." "......." "자는 거야?" "......." 홍재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그를 안아서 침대에 눕혔 다. 겉옷을 벗겨주다가, 고른 숨소리를 내면서 잠들어있는 한 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는 천천히 한준의 뺨을 쓰다 듬었다. 한 차례 심호흡을 하고 홍재는 거의 달리듯 옆 방으 로 건너갔다. 지사 사무실은 로어 맨해턴에 있었다. 금융기관의 본사 빌 딩이 밀집해있는 구역이었다. 시빅 센터가 보이는 워렌 스트 리트의 시티폴드 빌딩 10층이었다. "갔다와라. 난 저기 있을 테니까." 홍재가 길 건너편에 크게 간판을 걸어놓은 카페 테라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한준은 지사장 이하 직원들과 인사를 나눴다. 김호영이 웃 으며 말을 건넸다. "여긴 여름은 찜통이고, 겨울은 냉동실이죠. 시월 상순에서 십 일월 상순까지, 인디언 서머 기간만 사람 사는 곳 같아요. 안됐소. 좋은 계절 벌써 다 지나가고 있으니." "어떻습니까, 올해만 있을 것도 아닌데요." 옆에 서있던 양 기자가 농담조로 물었다. "그 거인 친구분은 가셨습니까?" "어제는 실례 많았어요." "아닙니다. 뭐 좀, 놀랐을 뿐인 걸요. ...참, 숙소는 어떻게 하실 예정입니까?" "알아봐야죠. 아파트에서 지내는 게 편할 것 같기는 한데" "아파트라면 뉴욕 타임즈 일요판하고 보이스 지에 상세히 실려 있어요. 오늘이 수요일이니까 보이스가 나왔을 겁니다." 한준은 나오는 길에 보이스 지를 사서 홍재가 있는 카페 테 라스로 들어갔다. 운좋게 그날 안으로 넓고 괜찮은 집을 구할 수 있었다. 가 격도 적당했으므로 그 자리에서 계약을 하고 호텔로 돌아왔 다. 어제는 피곤해서 몰랐지만 밤이 되면서 한층 머리가 맑아 졌다. 서울은 지금이 아침이기 때문일 것이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홍재가 건너와 있었다. 맨몸에 맨발로 진바지만 걸친 채였다. "훌렁 벗고 복도를 지나다니는 게 예의가 아니란 건 알고 있어? 너같이 형편없는 국민 때문에 우리나라가 욕을 먹는 거 라구." "유감있는 놈은 직접 말하라고 해. 내가 얼마나 예의바른 주먹을 갖고 있는지 가르쳐줄 테니까." "무식한 놈이 힘자랑밖에 할 줄 모르지." 그는 한준이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터는 것을 보고 있었 다. 한준은 젖은 수건을 문쪽으로 던져 놓으며 물었다. "자리 오래 비워놔도 돼? 센터 개관한 지 일 년 반도 안됐 잖아." "며칠 안 들여다본다고 망하진 않아." "그러지 말고 그만 가봐. 내가 걱정돼." 홍재는 픽 웃으며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한준은 머리를 빗으면서 거울로 홍재의 안색을 살폈다. 잠시 망설이다가 말 을 꺼냈다. "규섭이 어머니 수술하시는 날, 제수씨하고 병원에서 만났 어." "......." "제수씨가 너하고 완전히 끝냈다고 생각한다면 왜 규섭이 일에 아직도 찾아오겠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 지간하면 다시 합치지 그러냐. ...윤수 안 보고 싶어?" 홍재는 누운 채 한준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보고 싶지. 하지만 윤수 엄마 더 이상은 속이고 싶지 않 아." "속이다니?" 홍재는 깍지낀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단단한 가슴근육이 긴장한 듯 팽팽하게 부풀어올라 있었다. "애당초 그렇게... 이기적인 결혼 같은 건 하는 게 아니었어. ...결혼해서 가정을 갖게 되면 잊을 수 있을 줄 알았던 거야." "무슨 소리야?" "독한 마음 먹은 적이 수도 없었지.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 고, 전화도 하지 않겠다고. 언젠가 한번은 사진을 다 태워버리 기도 했어. 멀리 외국으로 떠나오면 생각하지 않게 될 줄 알 았어. 그런데...아무 소용 없더군. 사흘을 못 넘기는 거야. 목소 리라도 듣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데 어떡해. 결국 하루종일 안절부절하다가 전화를 하고 말아. 하지만 만나서는 언제나 농담이나 하다 헤어지지. 친구로 남아있는다면 영원히 함께할 수 있을 테니까." 홍재는 한참을 침묵 속에 누워있다가 벌떡 일어나 한준에게 다가왔다. 그는 마치 딴 사람 같았다. 한준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홍재는 힘껏 한준을 끌어안고 입술을 겹쳤다. "홍...홍재야..." "뭐가 어떻게 되든 좋아. 더는 참을 수가 없어. 미안해...." "...그만둬... 이러지 마" 한준은 막무가내로 덮쳐오는 그를 밀어내다가 문득 백민호 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농담은 네가 하고 있지, 안 그래? 날 친구로 생각했다는 둥, 좋아했다는 둥 해가면서 말이야. 한준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홍재 역시 민호처럼 얼음 같은 얼굴로 자신에게 등을 돌려버릴 지 몰랐다. 홍재마저 잃 는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두려웠다. 한준은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이렇게 해서 홍재를 잃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그래, 어렵지 않아.... 따뜻한 햇살이 아름다운 숲 속 가득 퍼져있었다. 형형색색 의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물 맑은 호숫가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앉아서 즐거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뭉게구름이 흐르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어머니의 웃음소리가 호수의 잔잔한 수면을 흔들었다. 작고 하얀 새가 우리 주위에 빛을 뿌리며 하늘 높이 날아갔다. 한준은 잠들어있는 홍재를 바라보았다. 한준을 꼭 끌어안고 있는 그는 행복해 보였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처음 꾸는 따 뜻한 꿈이었다. 한준은 홍재가 곁에서 지켜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파트는 가구도 다 딸린 채로 빌렸기 때문에 식기만 준비 해서 들어가면 되었다. 홍재와 함께 깨끗이 청소해놓고 보니 생각보다 더 근사한 집이었다. 집에 들어간 지 나흘 후에 메이시스 감사절 퍼레이드가 열 렸다. 센트럴 파크 웨스트 연도에서 메이시스 백화점으로 향 하는 행렬의 진로에는 한준의 아파트 앞길도 포함되어 있었 다. 화려하게 꾸며진 작은 차들과 행진곡을 연주하는 악단 뒤 로 만화 주인공 모습을 한 커다란 풍선들이 하늘을 뒤덮으면 서 따라갔다. 거리 양켠이 구경꾼으로 가득했다. 창가에서 행 렬을 보고 있던 홍재가 말했다. "몬트리올에 좀 다녀올께. 일주일쯤 걸릴 거야." "그럼, 너 오는 날 생일 차리자." "네 생일?" "아니, 너 말이야." "지난 지 다섯 달도 넘은 생일은 왜?" "작년에도 부실하게 넘어가고, 올해는 그나마 축전 한 장도 못 보냈으니 미안해서 그런다." "흠, <재즈재즈> 회장님이 엄선한 바에라도 데리고 가 주시 려나?" "억지 감투였다고 몇 번 얘기했어?" "선물은 내가 정할께." "뭔데?" "큼직한 리본을 네 엉덩이에 매놔. ...아야얏! 되게 아프네." 한준은 길을 걷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빌딩 사이 에 지그재그로 잘린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빌딩의 유리벽면 에 반사된 빛의 파도가 눈부시게 쏟아져내렸다. 한준은 얼굴 한가득 웃음지으며 두 팔을 펴고 폭발하는 듯한 빛 속을 달려 갔다. 나는 부서진 모형 비행기가 아니다. 아즈테카의 미친 태양 도 나를 잡지 못한다. 나는 불새다. 악몽은 사라졌다. 한준은 홍재와 같이 보낸 그 밤 이후로, 이십년 가까이 그를 괴롭혀왔던 악몽을 꾸지 않게 되었다. 이 제 더 이상 식은땀에 흠뻑 젖어서 흐느끼며 깨어나는 새벽은 없었다. 검은 옷의 사내는 완전히 한준에게서 떠나갔다. 한준은 기사를 마무리하여 서울로 전송하고 서둘러 옷을 갈 아입었다. 라 가디아 공항에 도착했다는 홍재의 전화가 십 분 전에 걸려왔다. 이십 분 거리니 곧 도착할 것이다. 브로드웨이 의 극장에서 연극을 보고, 미리 알아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으로 가서 선물을 줄 계획이었다. 한준은 정성들여 포장한 시계 케이스를 양복 주머니에 넣었 다. 시계 뒷면에 청옥석을 얇게 입혀서 'H?J가 H?J에게―영 원히 변치 않기를' 이라고 새겼다. 이 선물을 위해서 두 달치 월급을 털었다. 한준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욕실로 가다가 전화벨 소리를 들었다. 그는 고모려니 생각했다. 고모는 닷새만에 한 번 꼴로 전화해서는 한국에 들어와서 선을 보고 가라고 성화를 부렸 다. 아마 임기 마치고 귀국할 때까지 3년 내내 들볶일 지도 몰랐다. 현관문의 자물쇠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너야?" "응. 준비 다 했지?" 홍재의 목소리가 문 밖에서 건너왔다. 한준은 들떠서 주머 니 속의 꾸러미를 한 번 만져보고 수화기를 들었다. "예, 여보세요." "어땠어, 쇼치필리? 즐거웠다면 좋겠는데." 메탈 베이스가 웃음을 띠고 부드럽게 말했다. 한준은 그 순간 모든 것을 깨달았다.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천천히 얼어붙어오는 것을 느 꼈다. 손을 대면 즉시 뼈가 으스러져버릴 만큼 차가운 얼음이 었다. 홍재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한준은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간신히 중얼거렸다. "...안... 안돼... 안돼... 제발... 난... 이대로... 있...겠...어..." "그럴 순 없지. 꿈은 끝났으니까. ...넌 내가 셋을 셈과 동시 에 깨어난다. 깨어나서는 매우 여유롭고 편안한 기분이 들 거 다. 좋아.... 이제 네 몸은 지극히 평화로워졌다. 하나―둘― 셋."